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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빨랐지 그 양반

류종중 2021. 9. 17. 09:25


이게 시 인 줄 도 잘 모르겠지만, 해설도 재밌네요.



재미난 시 한편 올려봅니다..





[시 읽는 기쁨.. 재미있는 시]

    

♡참 빨랐지 그 양반 / 이정록





신랑이라고 거드는 게 아녀

그 양반 빠른 거야

근동 사람들이 다 알았지

면내에서 오토바이도 그 중 먼저 샀고

달리기를 잘해서 군수한테 송아지도 탔으니까

죽는 거까지 남보다 앞선 게 섭섭하지만 어쩔 거여

박복한 팔자 탓이지





읍내 양지다방에서 맞선 보던 날

나는 사카린도 안 넣었는데

그 뜨건 커피를 단숨에 털어 넣더라니까

그러더니 오토바이에 시동부터 걸더라고

번갯불에 도롱이 말릴 양반이었지

겨우 이름 석자 물어 본 게 단데 말이여

그래서 저 남자가 날 퇴짜 놓는구나 생각하고 있는데

어서 타라는 거여

망설이고 있으니까

번쩍 안아서 태우더라고

뱃살이며 가슴이 출렁출렁하데

처녀적에도 내가 좀 푸짐했거든

월산 뒷덜미로 몰고 가더니

밀밭에다 오토바이를 팽개치더라고

자갈길에 젖가슴이 치근대니까

피가 쏠렸던가 봐

치마가 훌러덩 뒤집혀 얼굴을 덮더라고

그 순간 이게 이녁의 운명이구나 싶었지

부끄러워서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는데

정말 빠르더라고

외마디 비명 한번에 끝장이 났다니까

꽃무늬 치마를 입은 게 다행이었지

풀물 핏물 찍어내며 훌쩍거리고 있으니까

먼 산에다 대고 그러는 거여

시집가려고 나온 거 아녔냐고

눈물 닦고 훔쳐보니까 불한당 같은 불곰 한 마리가

밀 이삭만 씹고 있더라니까

내 인생을 통째로 넘어뜨린

그 어마어마한 역사가 한 순간에 끝장나다니

하늘이 밀밭처럼 노랗더라니까

내 매무새가 꼭 누룩에 빠진 흰 쌀밥 같았지





얼마나 빨랐던지 그때까지도 오토바이 뒷바퀴가

하늘을 향해 따그르르 돌아가고 있더라니까

죽을 때까지 그 버릇 못 고치고 갔어

덕분에 그 양반 바람 한번 안 피웠어

가정용도 안 되는 걸

어디 가서 상업적으로 써 먹겠어

정말 날랜 양반이었지





○ 이정록(1964~)

     충남 홍성 태생. 시인, 고교 교사





<감상/조용숙>





이 시 참 재밌습니다.

어쩌면 시인은 이토록 슬픈 이야기를 역설적으로 풀어낼 수 있었을까요?

우리 인생도 이랬으면 좋겠습니다.

“신랑이라고 거드는 게 아녀. 그 양반 빠른 거야 근동 사람들이 다 알았지”





1연에서는 일찍 저 세상으로 간 신랑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돌아가신 분이 성격이 참 급했나 봅니다.

그러고 보니 일찍 가시는 분들은 뭔지 모르게 급하게 서두르는 부분이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2연은 두 분이 인연을 맺게 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얼마나 급했으면 뜨거운 커피를 단숨에 털어 마시고 오토바이에 맞선녀를 번쩍 안아서 태웠을까요. 오토바이에 태웠으니 남정네의 등에 여자의 가슴이 스치면서 젊은 혈기에 확 불을 싸 지른 것 같습니다. 얼마나 참기 힘들었을까요.

그것도 바야흐로 봄날인데 말입니다.





“부끄러워서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는데 정말 빠르더라고 외마디 비명 한번에 끝장이 났다니까”

“눈물 닦고 훔쳐보니까 불한당 같은 불곰 한 마리가 밀 이삭만 씹고 있더라니까”

“내 인생을 통째로 넘어뜨린

그 어마어마한 역사가 한 순간에 끝장나다니”





정말 한 순간에 모든 운명이 결정되고 마는 순간이 2연에서 펼쳐지는데 1연에서의 슬픔의 정조는 어디론가 다 사라지고 읽는 내내 웃음이 비죽비죽 새 나오게 만드는 서사입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마지막 3연은 더 절창입니다.

“얼마나 빨랐던지 그때까지도 오토바이 뒷바퀴가 하늘을 향해 따그르르 돌아가고 있더라니까”

얼마나 빨리 끝났으면 일이 다 끝나고 난 다음에도 오토바이 뒷바퀴가 하늘을 향해 따그르르 돌아가고 있었을까요?

그야말로 절묘한 묘사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어서

“죽을 때까지 그 버릇 못 고치고 갔어” 가 나옵니다.

분명 슬픈 이야기인데 어쩜 이렇게 슬픔을 웃음으로 단박에 바꿔칠 수 있는 걸까요?

거의 마술처럼 슬픔과 웃음이 교차되고 있습니다.

웃음 마술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덕분에 그 양반 바람 한번 안 피웠어 가정용도 안되는 걸 어디 가서 상업적으로 써 먹겠어 정말 날랜 양반이었지”

워낙 첫 행사를 빨리 끝내신 양반이라서 바람 한 번 피울 여력이 없으셨겠지요.

그런데 가정용도 안되었으니 어떻게 상업용이 되었겠냐는 말에 또 한 번 웃음이 터집니다.

그리고 마무리는 정말 날랜 양반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사랑하는 남편을 빨리 보낼 수 밖에 없었는데 이렇게 슬픔을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힘이라니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내공으로 가득찬 시인의 넉살 때문에 많이 웃었습니다.

#시 #인생 #신랑 #오토바이 #그양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