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후퇴길이 막힌 , 낙오된 인민군이나 빨치산의 70~80% 전라남북도 ,경상도와 연결된 지리산으로 피신,
나머지 20~30% 바다와 인접하고 노령산맥으로 전남북이 연결된 불갑산으로 피신하였다.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까지 북진했던 유엔군이 중국군의 공세에 부닥쳐 1950년 11월 말부터 1951년 1월 사이에 서울 이남 지역까지 철수한 1.4후퇴가 발생했다.
1.4일 서울이 다시 함락되자
전국의 빨치산과 남로당 동조자들이 다시 공산주의 세상을 꿈꾸며 재집결을 하였다.
전라남도 남로당 지구당 사무실이
불갑산 용천사에 생겼다.
용천사는 불갑산의 함평쪽 방향에 있는 절인데,
광주에서 오는 쪽에 있어서 이 곳에 자리를 잡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최고로 많이 모였을때 인원이 8,000명 정도 였다고 하니 그 세가 짐작이 된다.
다시 3.14일 서울이 재수복이 되고 휴전이 될때까지 38°선 공방이 지속되었다.
그 사이에 불갑산의 빨치산 토벌작전이 생겼고,
이의 토벌중 무고한 양민학살사건으로
거창양민학살사건은 이승만때 국회의원에 의해 폭로되었으나 ,
불갑산양민학살사건은 60년에 제기되 미흡하게 조사되다가 ,
박정희때 오히려 유가족이나 관련자들
을 빨갱이라고 구속함.
이때 당시의 공식기록으론 거창 150여명(실제 700여명), 불갑산 520여명 (실제
1,800여명 ) 양민이 학살됨.
불갑산양민학살사건은 불갑산의 반대편인 함평군의 해보면 나산면 월야면에서 주로 일어나 함평양민학살사건이라고도 불림.
두달간에 걸친 건벽청야작전 (불갑산 반경 2km 양민제거 , 가옥전소, 인간성을 상실한 중대장의 양민학살 , 집 불태운 후에 남은 삽과 곡괭이는 빨치산 무기획득이라고 전공으로 내세워 포상받음)으로 무고한 양민이 학살됨.
과거사 진상조사에서 몇년전에야 밝혀진 슬픈 역사인데 대부분 모름.
낮엔 군인세상 , 밤엔 인공세상이
불갑산 빨치산토벌작전이 끝나는 2개월 가까이 되어 ,
어렸을때 보면 , 제사 같은집이 많았고 , 세배도 안가는 집이 있었고 ,
술취하면 돌아가신 삼촌얘기하며 흥분하는
지인들도 있었던 슬픈사연이 있음.
저희 집옆 산으로 200~300m 돌아가면 공동묘지가 있다.
사방 100m 정도 넓이에 수십개의 묘가 겹
쳐져서 있어서 누구의 묘인지도 모르고 다칠까봐 무서워 알려고도 하지 않는 슬픈 공동 묘지임
.
지금은 잡초만 무성하게 덮혀 있어.
심지어 공동묘지가 있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많음.
(불갑산빨치산토벌땐 총든 빨치산 200여명 , 흰옷입은
피난자 (?) 1,500여명 사살함. 일부 150여명의 빨치산은 장성쪽으로 도망가 산발적으로 저항하다 소멸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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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함평 양민학살사건
1950년 12월 6일부터 1951년 1월 14일 까지 40일 동안 국군 11사단 20연대 2대대 5중대인 전남지구전투사령부에 의해 전남 함평군 해보면, 월야면, 나산면 등지에서 양민들이 집단으로 학살된 사건이다.
11사단 20연대 2대대 5중대는 함평군과 영광군의 경계 지점인 불갑산 외곽의 교통요지에 본부를 설치하고 양민학살작전에 들어갔다.
5중대는 1950년 12월 2일 공비와 전투를 벌여 부대원 2명을 잃은 앙갚음으로 12월 6일에 함평군 월야면 정산리 동촌과 장교마을에서 주민 70여명을 불러 낸 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논두렁에서 집단 학살하였으며, 12월 7일에는 월야면 월악리에서 7개 부락 주민 130명을 어떤 조사나 기준도 없이 무차별 학살하였는데 월악리에서는 이 사건을 "남살뫼학살"이라고 한다.
12월 10일에는 공비들이 마을 앞 도로를 파헤친 것을 주민들의 소행이라고 단정짓고 나산면 오치리에서 21명의 주민을 공동묘지로 불러내어 무참히 학살하였고 1951년 1월 14일에는 해보면 상곡리에서 주민들을 불러낸 뒤 산기슭에 기관총을 설치하고 50여명을 학살하였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총 6회 걸쳐 524명을 양민이 학살되었다고 하지만 이것은 1960년 국회가 양민학살특별조사위원회가 현장을 방문해 조사하여 발포한 것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1800명>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1사단장이었던 최덕신은 손자병법에 나오는 "견벽청야"를 작전명으로 하달하였다.
견벽청야란 적군과 전투를 할 때 성밖 수 십리안의 백성들을 성안으로 모두 불러 들이고 성곽을 튼튼하게 하고 백성들이 살던 집이나 들판에서 적군들이 군사물자나 식량을 얻는 것을 막기 위하여 불을 질러 들판을 깨끗하게 한다는 군사전략이다.
하지만 11사단은 양민들을 안전한 곳으로 이동을 시키지 않고 적군으로 간주하고 무조건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 중대장 권준옥대위는 권영구로 개명후 70년 중령예편후 91년 사망
* 거창양민학살과 함평양민학살을 주도했던 당시 11사단장 최덕신은 64년 월북하여, 대남선전용으로 이용되다가 지금은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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