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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령도 어민 폭동 및 해병 6여단 본부 난입사건

류종중 2022. 1. 19. 23:03

친구하고 저녁먹고 당구한게임치고 가다가,
어느 친구들 모임 단톡방에,
오전에 눈이와 앞이 잘 안보일때,
백령도 해무가 생각난다고 해서 예전에 써 놓은 글이 생각나 읽어 보고,
복사했습니다.

즐거운 저녁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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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령도 어민 폭동 및 해병 6여단 난입 사건

1.납북어민과 불령선인

86.10~87.3월 대청도 63대대 예비중대 소대장으로 있을때의 일이다.

5분대기출동하다가 중대 60트럭이 차량브레이크가 파열되어,
부대앞 언덕길 아래에 있는 마을의 민가를 들이받아,
민가가 반파되어,
민가에대한 피해포상으로,
손해배상금 60만원과 민가를 새로 지어주는 일로 자주 부대앞에 있는 마을 이장집을 찾아가던 때이다.

어느날 중대장과 소대장이 이장집에 갔는데,
자주 만나다 보니 이제는 안면이 있다고 좀 친숙해졌는지,
이장이 쟁반에 안주거리와 술을 담아 가져와, 마루에서 마을주민 한명이랑 같이 술한잔을 하게 되었다.

50대쯤으로 보이는 주민이었는데,
처음에는 우리에게 말도 잘 안하고, 피하려고만 하는 사람이었다.

이장의 소개로 술한잔 하면서도 눈치만 계속 보는 듯하고 자리를 빨리 끝냈으면 하는 분위기였다.

다음날 낮에 중대장이랑 다시 들려
집 짓는 현장을 둘러 보니
이장이 아는 척을 하더군요.

그러면서 어제 그 주민 이야기를 하더군요.

그 사람의 아픔과 고통을 하소연식으로 얘기합니다.

고기잡으러 갔다가 북한으로 끌려가 ,
다행히 되돌아왔지만
강릉 중앙정보부에서 6개월 교육을 받고 왔다고 하더군요.
북한에 억류되어 있는 동안 간첩교육을 받았는지,
사상교육을 받았는지 그 흔적을 찾거나 지울려고
강릉에서 심한 교육을 받고 온다고 하는데,
대청도에 그런 사람이 칠팔명인가 몇명있다고 하더군요.

신삥 소위가 그런 소리 들으니 생소하고
무서운 기분이 들더군요.

부대에 들어오는데,
중대장이 너 불령선인이라고 아느냐고 묻더군요.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기도 하는데 잘 모르겠더군요.

대청도와 백령도 주민들의 대다수는 6•25때 황해도에서 피난왔다가 고향으로 못 돌아간 사람들이고 , 고향으로 돌아 가고 싶어한다는 설명,
북방한계선(NNL)부근엔 고기를 남북이 서로 안잡으니 ,
어류가 풍부해 어선들이 자주 북방한계선을 몰래 넘으려는 경향이 많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납북어민들이 북방한계선을 넘어 고기잡이를 하다가 북한경비정에 피납되었다가,
북한에서 회유를 해도 강력하게 남한으로 귀국을 요청하는 경우엔 멸달이나 1~2년후 우리 나라로 돌아 오고,
회유에 넘어간 경우엔 안돌아 오는 경우가 많다고 중대장이 설명을 해주더군요 .

그러면서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불령선인이라고 얘기를 하고,

예비중대 10중대장이 3개월마다 주민들의 동향을 대대장에게 보고를 해야 하는데,
마침 교통사고로 주민들과 접촉을 자주하는 이 시기에, 더 주민동향등을 자세히 파악해서 보고하라고 대대장한테서 지시를 받았다고, 나한테도 잘 보라고 하더군요.

1) 불령선인 不逞鮮人

(표준국어대사전)

일제 강점기에, 불온하고 불량한 조선 사람이라는 뜻으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자기네 말을 따르지 않는 한국 사람을 이르던 말.

2. 납북어민 실태

1960년이후 북한에 납북된 어민은 3,000여명에 이르고,
힘든 과정을 거친후 되돌아온 어민들은 감금과 고문등으로 간첩자백등 반공법위반으로 1,300여명이 기소되었다.

특히 박정희 정부때이후 군사정권아래에선 정부의 지원대상이 아니라 감시의 대상이었다.
심한 고문으로 사망하거나 휴유증으로 자살한 경우도 많고, 간첩혐의로 본인과 가족들의 취직과 결혼등에 심한 차별대우를 받아 왔다.

최근들어 처벌을 받은 어민이나 가족들이 재심을 통해 무죄로 판명되어 명예를 회복하는 경우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납북됐지만 돌아오지 못한 어민들과 가족들은 수십 년이 지난 현재에도 그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북으로 납치된 가족들의 생사를 알 수 없는 데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노력도 부족한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6·25전쟁이 끝난 후 서해 앞바다에는 많은 어선이 몰려들었다. 물고기가 많이 잡히다 보니 어시장, 파시(波市)가 열리는 곳이 많았다. 파시는 물고기가 많이 잡힐 때 바다 위에서 열리는 생선시장이다. 이런 파시는 주로 흑산도를 시작으로 연평도, 대청도, 백령도에 이르기까지 서해안을 따라 유명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황금어장을 찾아 어선들이 서해로 몰릴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그러나 황금어장에서는 1960~70년대 비극도 함께 이어졌다. 남과 북이 대치하며 사상 경쟁을 벌이면서 납북 어선들이 늘어나 선전용으로 활용된 것이다. 또 육지에는 존재하는 휴전선이 바다 위에는 없었다. '정전협정'에서는 한 개의 군사분계선을 확정하고 쌍방이 이선으로부터 각기 2㎞ 후퇴해 비무장지대를 설정한다고 했을 뿐이다. 이런 이유로 남한 어선이 북한경계선을 넘었다는 이유로 납북도, 나포되기도 했다. 결국 1977년 북한은 일방적으로 '200해리 경제수역 및 해상군사경계선'을 선포했다.

㈔전후납북자피해가족연합회에 따르면 납북 피랍자는 3,835명이다. 어선원이 3,729명으로 가장 많고, 대한항공 납치 50명, 군·경 30명, 기타 26명 등이다. 이 가운데 송환자는 어선원 3,263명, 대한항공 납치 39명, 기타 8명 등 3310명이다. 또 탈북·귀환 어선원은 9명이다.

하지만 아직 돌아오지 못한 미귀환자는 516명이다. 어선원이 457명, 대한항공 납치 11명, 군·경 30명, 기타 18명 등이다. 미귀환자 516명의 가족들은 오늘까지 고통 속에 살고 있다.
사랑하는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기 어렵고, '간첩' 가족이라는 굴레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3. 납북어민이 발생한 이유

70년대나 80년대 언론이나 정부발표의 내용은 북한이 남한에 침투해 어선을 납치한 경우라고 발표해왔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남쪽이나 북쪽어선들이 고기를 안잡는 북방한계선부근이 어류량이 풍부해 북방한계선을 넘어 불법조업을 하다가 북한 경비정에 나포되어 납북된 경우이다.

물론 북한에서 침투해 나포한 경우도 있겠지만,
그 당시 군복무중 들은 얘기로는 그 경우는 매우 적을 것으로 군에선 판단했었다.

납북어민들이 발생하는 곳은 주로,
서해안 강화도 부근,
연평도 부근,백령도 부근이었다.

86.10~87.3월 사이에 이런 경우도 있었다.

저녁에 70기 1년 선배들이 나를 집합을 시켰다.
아마 기합을 줄려고 했을거다.
대청도엔 동기들이 000와 000 그리고 나 세명이 있었는데,
두사람은 해안방어 소대장이라 그날 못부르고,
나만 대청도 선진포구에 있는 어느 횟집으로 불러냈다.

70기 두세명하고 나하고
대대본부에서 만나 포구쪽으로 산길을 따라 내려갔다.

아마 나무가지로 한두대 맞은 것 같기도 하고 잘 기억이 안난다.

소주한잔하면서,
선배가 얘기를 하는데,
그날 상황실 당직을 서는데,
완전 비상이었다고 한다.

전날 해무가 10m도 안보이게끔 엄청 껴있었는데,
그런 날은 출항을 통제하는데, 아침에는 괜찮았다가 조업중에 갑자기 해무가 끼고 앞이 안보이고 그랬나 보더군요.

조업하던 어느 어선이 앞이 안보여 귀항하다가 문제가 생겨서 군부대에 구조요청을 했다고 합니다.
상황실에 있던 누군가가 좌표를 불러 주고 유도를 했는데,
그게 오히려 북한쪽으로 가게끔 해버렸는지, 어쨌는지는 모르지만, 그이후 그 배 소식이 없었다고 하더군요 .

쉬쉬하고 백령도 여단내에서 지휘라인에서만 알고 감춰버렸는데,
하루종일 대청도 대대 상황실에서도 초긴장을 했다고 하더군요.

술자리가 쎄하더군요.
그런데 그 이후 그와 관련된 얘기를 들어본 적은 없었습니다.

4.백령도 어민 폭동 및 여단본부 난입 사건

1) 원인
어선들의 잦은 북방한계선 월선을 통한 조업으로 여단장의 어선 출항금지 조치

2)발생일자
87년~88년 (기억이 가물가물),4월 ~8월은 수색교육기간인데 그땐 교육훈련만 했던 기억이 있으니 그 기간 제외한 어느 시기였음.
아마 88올림픽(88.9~10월)으로 남북 긴장 조성 원인 제거 위해 ,그 전에 적극적인 조치했던 것으로 기억

3)과정
전국에서 수백척의 배들이
어종의 어획시기에 따라 몰리는데,
출항전에 민관군에서 교육등 행정지도를 하지만,
일부 어선들이 과욕으로 통제를 벗어나 북방한계선을 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해 왔음.

이에 따라 다른 때와 달리
한척이라도 월선을 하면
출함금지 및 조업금지를 하겠다고 여단장 지시사항으로 경고

* 1차 어선 월선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하고 일부 어선 월선
- 1주일 출항금지 및 조업금지 조치
- 향후 월선시 2주 금지조치 예고
- 이때 어선이 납북되었는지는 모름

* 2차 어선 월선

- 2주일 출항조치 및 조업금지 조치
- 향후 월선시 1개월 금지 조치 예고

* 3차 어선 월선

- 1개월 출항조치 및 조업금지 조치
- 향후 월선시 2개월 금지조치 예고

* 4차 어선 월선

- 2개월 출항조치 및 조업금지 조치
- 향후 월선시 3개월 금지조치 예고

5. 사건 발생

* 2개월 금지조치 1주차 분위기

- 월선했다는 소문과
출항금지 됐다는 소문이 계속 났었는데,
이번에는 두달이라는 소문이 남.
- 물론 부대 상황실에도 전언 통신문(전통)으로 월선 및 출항금지 조치 내용이 옴
- 군인들은 이때 제대로 버릇을 고쳐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고,
- 술한잔하러 밖에 나가면,
주민들은 자기들 잘못은 생각안하고, 두달 금지면
그럼 우리보고 죽으라는 얘기냐 라는 하소연이 들리기 시작함

* 금지조치 2주째

- 어민들이 여단본부가 있는 북포리 주변으로 몇명씩 모인다는 얘기가 주초에 들렸지만 그러려니 하고만 생각함
- 여단본부앞 관사에서 출퇴근하는 중사들 선임하사들이 분위기를 들려주기도 함
- 어민들이 모이기 시작한다고 한후, 3~4일째쯤후 오후에 중대 행정실에 여단본부에서 대기하라는 비상호출이 옴.
어민들이 식당에 몇십명이 모여 술한잔 하고 흥분하기 시작한다고 함.
이때가 아마 오후 두세시쯤이었음(정확한 시간은 기억 못함)
- 한시간쯤후 어민들이 길거리에 몇십명모여 악쓰며 시가 행진하듯 걸어다니기 시작한다고 함.
일부 몽둥이,낫등 흉기도 들었다고 함
- 이때 여단 상황실에서 수색대 5분대기 출동 명령
• 실탄없이 단독군장으로 출동
• 군장은 베레모,위장복,k1소총.
• 중대장 말
"절대 때리지 마라"
"때리면 맞아라, 그냥 맞기만 해라"
• 옆에 있던 중대선임하사도 똑같이 얘기함.
• 79년 부마민주화항쟁때 출동했던 해병대 대대장 말과 똑같았다.
"때리면 맞아라"

6. 어민 폭동 및 부대 난입

* 1일차 어민 폭동 및 부대 난입

- 출동명령후 20~30분후
여단본부 수색대 도착
- 정문 바리케이드 치워져 있었음
- 주민들 몇십명이 이미 여단본부정문을 통과해 부대에 난입해 헌병,일부 여단본부 근무자들에게 난동을 부리고 있었음.
- 수색대 도착 바로 직전에 부대에 난입한 것 같았음
- 설마 부대에 난입하리라고는 예상 못하고 위병소 경비인력 보강등을 못 해
어처구니없이 당한 상태였음
- 두명인가가 낫하고 ,쇠 작살을
가지고 돌아다니고 있는 것을 보고, 여단본부안에 뛰어 들어 가며,
제압 지시함.
- 몸으로 막으며 주민들을 위병소 밖으로 몰아냄
- 이 시간이 10~20분 소요
- 이 과정에서 술취하고 흥분한 일부 격렬하게 저항하는 어민들에게 몽둥이등으로 맞는 경우가 생김
- 뱃놈들이 거칠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음.
물론 거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
자기들 생계와 직접 관련되어 있고,
술을 마신 상태에서 일부주동자들의 거친 항의에 군중심리가 작용한 것임
- 그냥 우리도 같이 패버리면 금방 제압할 수 있을텐데,
때리면 맞으라는데 미치는 줄 알았음.
- 전쟁터에서는 베레모가 아무 도움이 안된다는 것도 알았음.
- 우리 대원들도 큰 부상은 아니지만 휘두르는 몽둥이등에 팔,어깨등을 맞을 수 밖에 없었음.일부는 머리도 맞기도 함.
- 다른 놈들은 놔두고 낫,작살로 반항하던 놈들은 뚜드려패버리고 싶었고,
나중에라도 구속시켜버리고 싶었음.
- 나도 몇대 맞았던 것 같은데, 진압하던 순간에는 맞는 줄도 모르고 위병소 밖으로 몰아내는데 급급했던 것 같음.
- 진압후 몇시간동안 여단본부앞 북포리 거리를 순찰하고, 식당에 있는 사람들 전부 귀가조치 했었음.
그 시간은 어두어지고,
아마 저녁 9시넘어서 까지 였을 것임.

* 2일차 폭동 및 부대 난입

- 아침 식사후에 대기하는데 수색대 5분대기 출동 명령
- 단독군장인데 이번에는 다들 베레모 대신 철모를 쓴 단독군장이었다.
어제 살짝만 스쳐도 베레모는 도움이 안된다는 것을 다들 느꼈었다.
- 대검 착검 얘기도 나왔던 것 같은데, 탄띠에 차고 있던 대검들은 풀어 놓으라고 했던 것 같다.
흥분해서 찔러 버릴 수 있어서 그랬던 것 같기도 하는데, 정확한 것은 기억이 없다.
- 가는데 20~30분 걸리는데 괜히 일찍 출동하는 것 같았다.
오더라도 어제같이 점심때나, 저녁때 만나 술한잔하고 쳐들어 오지 맨정신에 아침부터 오지는 않을 것 같았다.
혹시나 하고 미리 불러 놓았던 것이었다.
- 여단본부에 도착하니
정문 위병소는 헌병들이 지킬테니,
우린 여단장실 가는 언덕길쪽만 지켜달라고 한다.
- 대원들 자리배치하고 몇시간 기다리는데 지루하고, 점심때가 지나니 긴장도 느슨해지고, 배가 엄청 고팠다.
- 오후 서너시가 되니 어민들이 모이기 시작한다고 한다.
- 다시 긴장모드가 되고 한두시간 지났을까,
- 어민들과 아주머니들이랑 30~40명 정도가 몽둥이등을 가지고 악을 쓰고 있다.
"고기잡게 해달라"
"출항금지 해제하라"
"죽게 생겼다"

- 위병소 정문에서 100여m 쯤 후방 언덕길에서 지켜보고 있는데,
저러다 또 뚫리는 것 아니야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역시나 뚫려버린다.

앞에 있는 놈들이 몽둥이질하고,
피하느라 헌병들이 자세 비틀어져 있을때 ,
수대로 밀어버리니 뚫려버렸다.
정문에 바리케이드를 더 많이 쌓던지,
때리면 맞는 것도 좋지만 무슨 방패도 없이 맞고만 있으면 안뚫리냐,
병력충원을 많이 해놓던지 욕이 나왔다.
헌병체면에 자기들이 충분할 줄 알았나 보았다.

- 할 수없이 다급히 우리 수색대가 정문으로 내 달렸다.
- 그게 1~2분만 빨랐으면 좋았을텐데 이미 몇십명이 난입을 해서 쉽게 진압이 안되었다.
- 비록 k1이어서 개머리판이 없지만 그냥 찍어버리거나, 한대 패버리면 금방 진압을 할 수 있을텐데,
맞으면서 몸으로만 밀어낼려니까 힘들었다.
더 난감한 사람들은 아줌마들이었다.
그냥 몸으로 밀면서 악을 쓰는데 넘어지면서도, 생때쓰고 난리라 끌어 내는데 힘이 들었다.

- 어민들을 부대밖으로 끌어내고,
몇시간을 어두어질때까지 여단본부앞 북포리 일대를 순찰하며 주민들을 귀가시켜야 했다.

거칠게 양팔을 잡고 내동이치면 또 민원이 생길까봐 ,
한사람 한사람 설득하면서 몇십미터 후방으로 데려다 놓으면, 또 악쓰며 달라드는데 별 뾰족한 대책이 없었다.
그래도 말로만 설득해도 시간이 지나고, 어두어지니까 소요가 잠잠해져 귀가를 하더군요.

• 한밤중이 되어 귀대를 하는데,
얼마나 신경을 쓰고 몸을 썼는지 점심, 저녁 두끼 좀 굶었다고 배가 고파, 배가 아파 죽을 것 같았다.

* 3일째
- 아침부터 여단본부에 출동했다.
- 오늘도 뚜드러 맞고 굶겠구만 하고 넉두리가 절로 나왔다.
- 10시나 되었을까 도착한지 얼마안되어
옆에 있는 전령에게 중대에서 무전이 왔다.
" 상황끝! "
" 부대 복귀 "

이 부분은 긴가 민가 하다.
출동한 것 같기도 하고,
출동전에 비상해제된 것 같기도 하다.
내 기억엔 갔다가 되돌아 온 것 같은데 부정확하다.
그 사이에 며칠동안 여단본부와 어민간의 타협이 몇차례에 있었다.

7) 민군 협상타결

- 어민 폭동 및 부대 난입자 미처벌
- 출항금지 및 어업금지 조치 단축 및 해제
• 2개월금지에서 2주후 해제로 1개월로 단축
- 어선 월선금지 약속
- 어민 스스로 월선금지 자체적으로 감시 감독

※ 어민이 폭동을 일으키고,군부대에 어민이 흉기를 들고 난입하고 군인을 폭행한 사건은 엄청 큰 사건이지만,
그냥 쉬쉬하고 말았다.

일부러 뉴스를 유심히 봤지만 나오지도 않았고,
만만한 우리 수색대 대원들만 뚜드러 맞기만 한 백령도 어민 폭동 및 여단본부 난입사건이었다.
그래도 그 여단장은 그 후 사단장 진급은 물론 해병대 사령관이 되었다.

벌써 30몇년이 지나서인지 기억이 가물 가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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