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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탄 상놈과 텃세

류종중 2022. 7. 27. 11:49

말탄 상놈과 텃세

시골친구 몇명이 만나 소주한잔하다가 어렸을때 얘기를 하는데,

우리 동네 뒷길 기억하냐,
상놈이라고 세배받지 말라는 얘기 들어봤냐,
말탄 상놈 얘기들어 봤냐 하면서 어렸을때 얘기들을 하다가 ,

다른 얘기가 나와 그 얘기는 어영부영 그냥 끊어졌었는데,
그후 어느날 갑자기 그 생각이 나서 기억을 다시 더듬어 보았다.

시골은 어디를 가나 집성촌이 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마을의 성씨 집성촌에서는
타성씨에 대해 터부시하는 일들이 비일비재 했었다.

터부란
(네이버 국어사전)

1.미개한 사회에서 신성하거나 속된 것, 또는 깨끗하거나 부정하다고 인정된 사물ㆍ장소ㆍ행위ㆍ인격ㆍ말 따위에 관하여 접촉하거나 이야기하는 것을 금하거나 꺼리고, 그것을 범하면 초자연적인 제재가 가해진다고 믿는 습속(習俗).

2.특정 집단에서 어떤 말이나 행동을 금하거나 꺼리는 것을 말한다.

내고향에도 타성씨에 대한 터부시한 행태도 만만치 않았다.

불갑면엔 강씨성이 많다.

타지역은 김이박씨가 많은데,
불갑은 강씨가 많다.

그래서
지방자치제가 생긴이후,
지방의원으로 전국최다선인 9선 군의원이 불갑면 대표 영광 군의원 강필구의원이다.

불갑면 상불갑인 방마리,자비리, 금계리, 쌍운리는 대부분 강씨 집성촌이다.

이 강씨들에 얽힌 타성씨에 대한 차별에 대해 얘기하고자 한다.

품앗이를 타성씨에 대해선 안해주거나,
따돌리는 일들이 비일 비재했는데,
세배를 못오게 하기도 하고,
신작로인 큰길도 못 지나가게 했다.

우리 집도 할아버지나 아버지께서 농사일에 많이 힘들었었다고 말씀을 하셨었다.

일손이 많이 필요한 농사일에,
이웃에 사는 강씨들이 품앗이를 안 해주니,
우리 집 일들은 절고랑이라고 멀리 절밑에 사는 분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었다.

초등학교때 어린 애들한테 자주 있는 ,
자기 마을을 지나야 갈 수 있는 다른 마을 친구들을
잡아 놓고, 괴롭히는 텃세가
어른들 세계에도 얽혀 있었다.

집성촌에 타성씨가 오는 경우는,

요즘같이 전원생활을 즐기기 위해서 오는 경우는 하나도 없었다.

먹고 살기 힘들어서,
처가집 동네에 들어 오는 경우도 있고,
흘러 흘러 집성촌 외곽으로 정착하는 경우가 있었다.

또 타 성씨들 사람들이 많은 마을에 이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고흥 류씨들도 마찬가지였다.

1926년도에 불갑저수지가 준공이 되었다.

저수지에 수몰된 마을은
3개리에 해당되어 마을이 없어지기도 했고,

녹산리에 크게 집성촌을 형성했던 류씨들도 절반이 수몰되어 고향을 떠나야 했다.

전북 고창, 함평지역으로 많이 이주를 하고,

불갑을 떠나기 싫은 분들은 불갑면으로 뿔뿔히 흩어졌다.

중학교 옆 오사부락,
생곡리 생실,
자비리 삼수동,
그리고 내가 태어난 방마리 쌀고개(삵곡재)등이다.

당시의 땅값은 지금 부자동네인 압구정 자갈밭과 비슷했을 것이다.

그때 서울로 오시지 왜
불갑 산속으로 들어가셔서
이 후손들을 고생시키는지 모르겠다고 장난으로 푸념하기도 했었다.

품앗이니 세배얘기는 뻔한 얘기이니 다들 어느정도 짐작하시리라 생각된다.

말탄 상놈얘기나,
신작로를 못지나가게 한 얘기는 무슨 조선시대 얘기인 줄로 아실 것이다.

지금부터 100년전 얘기이니까,
할아버지나 할아버지의 아버지때 이야기이다.

저주지로 수몰민이 된 류씨중 불갑을 떠나기 싫어 ,
강씨 집성촌이 아닌 불갑면 자비리 삼수동으로 이주한 사람들의 얘기다.

불갑저수지로 전답과 집이 수몰된 사람들에게 지금처럼 토지보상자금이 지급되었을 것이다.

농사를 지을려고 논을 살려고 해도 파는 논이 없었다.

그래서
할 수 있는게
달구지를 사서 영광읍에 물건을 실어 나르거나,
장날에 영광장, 함평 문장장등을 다니며 물건을 팔고자 했을 것이다.

어렸을때 어떤 분은 염산에서 젓갈을 사다가 동네에 팔기도 했었다.
그 짐수레는 말이 끄는 마차였다.

삼수동에 이주한 이 분도 달구지를 끌 말을 샀는데,

마땅히 가지고 팔 물건이 없었나 보다.

사 놓은 말을 그대로 두기 그래서,
영광장날마다 말을 타고 다녔다고 한다.

삼수동은
자비리 단산부락과,
방마리 봉동 부락 사이에 있는데,
건무산쪽으로 쭉 들어가야 있는 마을이다.

어느 장날
삼수동 이분은 그날도 장에 말을 타고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걸 본 자비리 단산부탁
대지주(?)이면서 항렬이 높은 분이 베알이 꼴렸나 봅니다.

자기는 힘들게 걸어가는데,
타성씨로 이주한 상놈이 말을 타고 가다니,

한소리 하다가 시비가 붙었었나 봅니다.

집에 돌아 온 단산부락 어르신이 ,
비위에 거슬리고 아니꼬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단산부락 항렬이 낮은 집안 사람들을 불러 모아
그 얘기를 하니 다들 흥분을 했다고 합니다.

자기들은 20리길을 머리에 이고,
지게에 지고 읍내에 걸어다니는데,

저 !
상놈의 새끼는 말타고 느긋이 다닌다고
다들 흥분했다고 합니다.

단산부락에서 영광에 갈려면 ,
방마리 봉동부락을 지나야 합니다.

그 사이에 있는 삼수동은 건무산쪽으로 300m쯤 들어 가 있습니다.

삼수동 사람들도
밖으로 나올려면,
방마리 봉동부락을 지나야 합니다.

그래서
자비리 단산부락 사람들이 봉동부락으로 몰려갔습니다.

마침 봉동부락도 강씨집안입니다.

촌수를 따지면 멀더라도
다같은 강씨이어서,

저 말탄 상놈을 이 마을앞에 지나가지 못하게 하자.

베알이 꼴려 도저히 못보겠다고 얘기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봉동 강씨집성촌도 다들 일가라,
종가집 어른이
그렇잖아도 나도 꼴뵈기 싫었다.

아예
말탄 상놈뿐아니라
마을 전체 사람들을 못 다니게 하자 하고 결론을 내고,

삼수동 사람들을 봉동마을앞 신작로를 못지나게 했다고 합니다.

삼수동 사람들은 할 수 없이 길을 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짐이 없을때는 언덕을 넘으면,
쌍운리 운제부락이 나오게끔 길을 냈습니다.

그런데
나락한가마니라도 팔아야 살 수 있는데,
언덕길을 도저히 오르기가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방마리 봉동부락 뒤쪽으로 길을 내었습니다.

이 길은 1970년대까지도 사람들이 다녔습니다.

제가 어릴때
우리 밭 옆에 봉동 뒷길로 이 길이 있길래,
아버지께 어디로 가는 길이냐고 물으니,
삼수동으로 가는 길인데,
지금은 잘 안쓴다고 하더군요.
울퉁불퉁한 산길인데,
달구지는 다닐 수 있는 길이었습니다.

조선시대에나 통했을거라 생각되는,

말탄 상놈이 부른 마을 텃세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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