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토)일엔 행사가 세건이 있었는데,
마침 대전 부근이어서 세군데에 참석을 할 수 있어서 좋았다.
저녁에 잠깐 흑룡수색대 정기모임에 들려 인사를 드릴 수 있어서 그 또한 다행이었다.
모임에 갔더니,
군복 비슷하게 만든 단체복을 입은 친구들이 몇명 있어서,
새삼 수색대의 모습이 다르게 느껴지기도 했다.
일요일에 서울에서 친구 자녀 결혼식이 있어,
저녁내내 함께 하지를 못하고 서울에 올라와야 해서 ,
운전때문에 술한잔 제대로 같이 못해 미안하고 아쉬웠다.
일요일에
12시 결혼식이 끝나고,
친구들과 시작한 술이 저녁까지 4차로 이어져,
마지막에 아차산역부근에서 조그만 한식집을 하는 시골 여동창집에 저녁먹자고 들렸다.
가볍게 마지막 한잔하고 일어서 나가려는데,
우르르 커다란 덩치들이 8명이 들어오면서 필승 ! 필승 ! 하면서 인사들을 한다.
한친구는 저 63대대 출신입니다 한다.
두달정도 전에 이 식당에서 몇명하고는 처음 인사했던
적이 있었는데,
내 얼굴을 기억하고,
그 사람들이 나를 소개했던 것이다.
이 식당 여자 동창 부군이,
1973년도에 243기로 포항수색대에서 근무했던
이유로 ,
그 부근에 사는 해병대출신들이 가끔 모여 운동하고 식사하러 들린다고 한다.
친구들이 나가고 있어,
같이 술은 못마시고,
소주만 5병 서비스로 협찬하고,
집에 지하철을 타고 오는데,
술취해선지 해병대가 뭐지 하는 생각도 나고,
공주에서 전날 만났던 흑룡수색대친구들이 밴드에 올려준 글 잘 보고 있다고 몇명이 얘기하는데,
맨날 술마시는 얘기만 올리고, 그것도 최근엔 뜸하다고 하던 말이 생각나고,
평소에 궁금해 하던 ,
마니산까치부대와 망치부대에 대한 것을 한번 올려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2주전에 버스한대 빌려 고향 선후배들과 실미도 놀러 갔을때,
서울에서 이동하는 버스안에서,
한시간 반 정도 걸리는 버스안에서,
서로 인사소개도 하고,
남는 시간에 재미를 위해,
우리가 가고 있는 실미도 관련 얘기를 해드렸었는데,
그때 해드렸던,
실미도 북파공작대와 영화 실미도가 생각나는데,
그 중에
1968년에 만들었던, 해병대 북파공작대인
마니산 까치부대,
그리고
1982년도에 만들었던
망치부대 생각이 떠올랐다.
1984년에 망치부대가 없어지고,
망치부대가 훈련하던 자리, 숙영지 막사가 세워졌던 자리에,
1986년 10월부터 흑룡수색대 창설준비를 했었는데,
(1987.1월 부대 창설)
이것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한번 올려드리면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올리는데,
혹 몰랐던 역사적인 진실이 있다면 참조하시라고 올리니 양해 바랍니다.
1. 북파공작부대와 무장간첩 관계
6.25이후 해병대 북파공작부대는 두번 만들어졌는데,
이는 북한의 무력도발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에 유독 무장간첩사건이 많았었는데.
그 시대적 배경을 알면 이해하기가 쉽다.
1953년 한국전쟁 휴전이후,
1972년까지 20년동안
남북은 서로 간첩들을 많이 보냈다.
우리나라는 간첩의 존재를
부인해 오다가,
2002년이 되어서야 그 존재를 인정을 했다.
그 동안 서로 얼마나 많은 간첩을 보냈으면,
1972년 7•4남북공동성명에 이제 서로 간첩 좀 그만 보내자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그 내용이 들어있는지도 30년동안 숨겨왔었다.
20년동안 남한에서 보낸 간첩의 숫자는 무려 10,000명에 이른다.
그중 300명이 사살되고,
7,700명정도가 행방불명이다.
행방불명의 대부분은 자수나 생포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자수자가 많았던 이유는 두가지다.
북파공작원은 주로 중앙정보부에서 보냈다.
군부대는 두군데이다.
동해안 산악지형을 통한 침투부대인 육군 HID ,
해안을 통안 침투부대인 해군 UDU 이다.
중앙정보부는 민간인을 고용하여 보냈었는데,
주로 이북출신을 많이 모집을 해서 교육을 시킨후 보냈다고 한다.
북한출신자들이 사투리등 행동 양식, 지리를 잘 알아서 였다고 한다.
그런데
북한에 가면 다 전향을 해버리는 이유는 경제적인 이유가 컸다고 한다.
1960년대 말까지만 해도 북한히 우리보다 더 잘 살았다.
비근한 예를 들면,
내가 1968년에 초등학교 1학년이었는데,
2학년때인가 우리는 초등학교가 무료가 되었다고 자랑을 했었다.
그러나 1973년에 졸업할때까지 전액무료가 아니고,
월 육성회비를 내야 했다.
아마 한달에 30원인가 했는데,
그 돈을 못냈던 몇몇 친구들은 남아서 화장실 청소를 낼때까지 해야 했었다.
그런데
그때 당시 북한은 고등학교까지 전액 무료이었다.
우리나라는 2021년이 되어서야 고교무상교육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북한에 넘어가서는 잘 사는 모습에 혹하고,
가족이나 지인들때문에 자수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던 이유다.
2. 1968년 1.21 청와대 습격사건(김신조간첩사건)
그 동안 남북은 서로 간첩을 보낼때 소수인원단위로 보냈었는데,
1968년 1.21일 청와대 습격사건때는 31명의 무장 특수부대가 서울 세검정까지 침입을 했다.
31명중
29명 사살,
1명(김신조) 자수,
1명 북한으로 도주한 사건인데,
이로 인해 많은 군경이 사망을 했다.
이중 종로경찰서장, 연대장도 사망을 했는데,
연대장은 북한으로 탈주하는 1명의 간첩에 의해 사망했다.
두명 다 공을 세우기 위해 앞장을 서다 변을 당한 경우로 생각된다.
* 대규모 무장간첩사건 배경
1965년부터 미국이 베트남에 직접 무장 병력을 투입을 했다.
그 전에는 10년동안 경제적인 지원만 했었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도
1965년 월남에 파병을 시작했고 , 1973년에 철수할때까지 많은 병력을 파병을 하고,
파병병력은 5만명선을 유지를 했다.
그중 8년동안 5,000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미군은 58,000여명이 사망했다.
이때 월맹의 호치민이 북한의 김일성에게 남한의 파병을 이유로 , 북한군의 파병을 요청하게 된다.
그렇지만
김일성은
남한의 파병비용은 전액 미국의 비용이다.
우리가 남한보다는 잘 살지만,
외국에 수만명을 파병할 정도로 여유가 힘들다고 거절을 하고,
대신에 간접적인 활동으로 더이상 파병이 늘어나지 않게 하겠다고 하면서,
대규모 무장간첩단을 남파하게 된다.
그 시발점이
1968년 청와대습격사건이다.
과거와 다른 모습이고,
그 이후 이런 무장간첩사건이 많이 발생했는데,
그 배경을 알면 이해가 쉽다.
3. 북파공작대 마니산까치부대
1968년 북한 124군 특수부대가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서울 세검정까지 침투했던 1. 21 사태(김신조간첩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중앙정보부가
박정희대통령에게 잘 보이기 위해,
우리는 더 강력하게 네개의 북파공작대를 만들어 침투시키겠다고 한다.
인원은 1.21무장간첩과 같은 31명으로 만들겠다고 시작을 한다.
중앙정보부는 당시 4군체제였던 육해공군 해병대에 북파공작부대를 만들었다.
육군 : 죄수중심 선갑도 부대
해군 : UDT 현역중심 장봉도부대
공군 : 민간인 실미도 부대
해병대 : 해병대 현역 마니산 까치부대 MIU
북파공작대 / 마니산 까치부대 MIU
- https://naver.me/5ZvwsWBC
이중 공군 실미도 부대는
만든 날짜를 기준으로 684부대(오소리부대)로 부르기도 한다.
공군소속이지만 중앙정보부 지휘를 받았다.
온갖 감언이설로
가난하고 못배운 젊은 청년들 31명을 모집을 했다.
(인원은 김신조부대원과 동일하게 31명으로 급조)
- 훈련기간 : 4~7개월
- 보수 : 당시 초급교사 초봉 월급 1만원인데, 16만원 제시,
요즘 기준이라면 월 300만원 수준 월급인데,
월 5,000만원 ~ 1억 제시
- 훈련 종료시 거액 제시
- 담배 : 당시 5원이던 봉초대신 60원하던 최고급담배 신탄진담배 이틀에 두갑제공
- 훈련 종료시 미군부대 취업등
그러나
미국의 반대로 북한침투를 실시하지는 못했다.
1968년에 미국은 베트남전에서 많은 미군의 사망으로 반전운동이 생겼다.
이때만 해도 미국은 징병제를 실시했었는데,
베트남전 이후로 모병제로 바뀌었다.
남한의 특수부대가 북한을 네군데나 침투해서,
김일성의 주석궁을 침투한다면,
전쟁이 일어나리라 판단하고,
도저히 두군데 전쟁을 유지할 수 없어서 반대를 했다.
또 하나는
68.1.21일 청와대습격사건후, 삼일후에,
미국 첩보함 프에블로워 함이 원산앞바다에서 첩보활동울 하다가 북한에 나포되었다.
미국은 배와 선원들의 귀환을 위해,
북한의 신경을 거슬리지 않기 위해 북파공작부대의 북한 침투를 반대를 했다.
국제정세의 변화등으로 언제일지 모르는 대기훈련으로,
제대로 보수도 안나오고,
혹독한 환경속에서 훈련중 7명이 사망하고,
부대창설 3년4개월만인
1971.8월에 나머지 부대원 24명이,
국제정세의 변화로 용도가 폐기된 자신들을 제거하려던 정보를 입수하고 ,
먼저 선수를 쳐서 기간병들을 사살하고 섬을 탈출해, 버스를 탈취하고 자신들의 억울한 처지를 세상에 알린다며 청와대로
향한다.
서울진입과정에서
서울 대방동 유한양행앞에서 군경과 교전이 벌어져 사살되거나 수류탄으로 자폭을 한다.
살아남은 4명도 군사법원에서 사형이 선고되는데,
대법원에 항고를 안하면,
사형을 취소하고 월남전에 보내준다고 속여, 항고를 포기하게 하고 이듬해에 사형에 처한다.
이유는 대법원에서 그 비리의 실상이 밝혀지는게 두려워서였다고 한다.
실미도 사건으로 아이고 뜨거워라 깜짝 놀란 다른 북파공작부대도
- 1972년 육군 선갑도 부대가 해체되고,
- 1973년 해군 장봉도 부대는 해군 북파공작부대 UDU부대에 합류하고,
- 1975년 해병대 마니산 까치부대도 해체되어,
일부는 해군 UDU에 합쳐지고,일부는 해병대 부대로 원대복귀하고, 일부는 김포사단 수색대 창설요원이 된다.
이 중 한명 김포수색대출신 김남석원사는 1987년에 흑룡수색대에 오게 되어 나랑 2년정도 군대생활을
같이 했었다.
김남석원사가 가끔하던 얘기가 생각난다.
당시 김신조부대는
얼어붙은 임진강을 건너 파주로 침투를 했었는데,
도중에 나무꾼 4명에게 발각이 되었다.
나무꾼을 죽이고 땅에 묻을려고 하니,
겨울이라 처치가 곤란해서 살려 주었다고 한다.
나무꾼들의 신고를 받고 군경이 출동을 했지만,
이들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당시 육군 출동 기준은,
30kg 군장을 메고,
한시간에 4km 산악행군이어서 ,
포위망을 그 기준으로 했었는데,
북한 특수군은 10시간을 기준으로 했을때,
1시간에 7km를 돌파를 해서 잡지를 못했다고 한다.
김남석원사가 흑룡수색대에 요구한 것이,
김신조를 이겨야 한다며 1시간에 8km 이었다.
* 영화 실미도
실미도 부대를 주제로 한 2003년 강우석 감독 영화 실미도는 우리나라 최초로 1,000만 관객돌파 영화라는 대기록을 세우게 된다.
당시 영화세트장은 구청에서 공무원들이 허가기간이 끝난 불법건축물이라고 철거를 해버린다.
영화세트장이 관광상품이 되는 현실을 모르는 근시안적인 행정이었다.
실제 실미도 부대와 영화 실미도의 다른 점은
크게 두가지이다.
원래 계획은 사형수를 중심으로 부대를 만들려고 했는데,
사형수들 사망시엔 변호사,가족에게 그 실상을 알려야 하기에 법무부 반대에 부딪혀 취소되어,
민간인을 대상으로 모집을 했는데,
영화에선 사형수들로 만든 부대로 표시되어, 국가에 의해 사망에 이르게 되는데 가족들의 명예훼손이 문제가 되었다.
두번째는 보수와 대우다.
영화에선 제대로 대우를 받아 부러워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정반대이다.
보수는 처음 3개월만, 그것도 약속의 0.5%정도인 3,500원만 지급하고, 부정부패로 중앙정보부에서 대부분 보수를 착취하고, 그후에는 아예 지급하지 않았었고,
관심없는 천덕꾸러기 신세로 나중에는 식사도 제대로 제공을 안했다고 한다.
* 영화 실미도 관련
https://m.terms.naver.com/entry.naver?docId=971749&cid=42620&categoryId=42620
4. 해병대 812부대 망치 부대
(2차 북파공작부대 설립)
81.8.12일 작전 계획에 의해 만들어져 812요원이라고 부른다.
이 부대의 존재자체를 군 수뇌부뿐만 아니라 ,
해병대 사령부도 부인을 해오다가,
2002년이 되어서야 인정을 한다.
그러나 부대존재자체를 부인해오다 보니,
그 적지 침투 근거 자료가 존재하지 않아,
적지 침투훈련을 한 요원은 198명이지만,
(훈련과정 300명 수료)
특수임무수행자보상법에 따른 보상과 인정을 못받고 있다.
망치처럼 바로 때리고 거둔다해서 일명 망치부대라고 부른다.
* 812 망치부대 설립 배경
- 1980년 횡간도 무장간첩사건
- 비무장지대 총격사건
- 1981년 빈번한 서해상 NLL 침범행위
- 미 정찰기 격추 미수사건
- 81.8.12일 북한 미그기 편대 백령도 상공 침공
- 81.9월 88월림픽 개최지 선정 방해등
극도로 고조된 남북한의 군사적대치상황에서,
북한의 대남도발억제차원에서,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의 강력한 대북응징보복 조치에 따라 만들어졌다.
82년 3월부터 84년 10월까지 2년 6개월동안 유지되었던 부대이다.
포항 1사단 22대대,72대대 IBS해병대 대대병사중에서,
수색교육을 수료한자중,
25명씩 선발을 해서,
3개월씩 22대대 백령도,
72대대 연평도에서 북한 침투폭파훈련을 했던 부대이다.
수색교육중 수영 마지막 평가가 바다 수영 12km인 이유는,
백령도에서 망치부대가 침투목표인 월내도까지 직선 거리가 12km이기 때문이다.
흑룡수색대 부대 뒤산에 시멘트블록으로 만든 건물이 여러개 있었는데,
이는 침투해서 장악하기 위한 월내도의 건물특성을 감안해 만든 훈련장이었다.
연평도에서 훈련하던 어느 망치부대는 ,
연평부대와 10km 무장구보시합을 했었는데,
생각외로 연평부대에 져버려서 놀림을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연평부대 전역자 얘기라고 함)
https://m.blog.naver.com/ironman236/222532348350
* 버마 랭군 아웅산사태
1983년 10월
전두환대통령이 버마(미얀마) 방문때 수도 랭군의 아웅산묘지에 방문하기로 했는데,
대통령은 수상한 첩보를 듣고 예정보다 10분 늦게 묘소에 도착해서 무사하고,
대기하고 있던 장관과 청와대 수석들 17명이, 북한 특수부대가 설치한 폭탄이 터져 사망하고 15명이 부상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해병대 망치부대와 육군 공수부대의 보복전쟁이 일어 날 뻔 했는데,
이때도 미국의 반대로 무산되고,
86아시안게임,
88올림픽등의 평화무드 이유로 망치부대도 84년에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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