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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사령관 이취임에 대한 소고

류종중 2021. 7. 23. 12:24



☆ 이승도 해병대사령관 전역에 대한 小考 ☆



4.12일 해병대사령관 이취임식이 예정되어 있다.



이승도중장(해사40기) 전역에 따라 ,

김태성(해사42기) 1사단장이 중장으로 진급과 함께 제 36대 해병대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해병대 사령관 출신의 4성 장군(대장)이 언제 탄생할지 안타까운 마음에 여기 저기 자료들을 뒤져보았다.



2019년 4월 군 인사법이 개정되었지만, 이번에도 진급이나 전직이 아닌 전역이다.



기존 군인사법에 따르면,

해병대사령관은 임기를 마치면 무조건 전역해야해서 대장진급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는데,



군인사법의 개정으로

3성 장군(중장)인 해병대 사령관이 2년 임기를 마친 후에도 진급하거나 다른 직위로 전직할 수 있다.



개정을 주도한 더불어민주당의 안규백 당시 국방위원장은 “해병대에도 대장 진급의 기회를 주는 게 기회균등의 원칙과 각 군 균형발전 기조에 부합한다”고 말했다.



안규백은 육군 일병 소집 해제로 6개월 방위 출신이다.



예전엔 독자인 경우 6개월 방위근무후 일병 전역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방위원장을 역임하면서,



해병대출신 여야 9명의 의원들을 중심으로,

해병대사령관의 대장의 길을 열어 주었다.



물론 보좌관이 해병대출신이어서 그의 영향력과 노력이 컸다고 한다.



해병대 사령관은

69년~73년동안 세명의 사령관만 대장이었고,

73년 해병대해체후 해군소속으로 바뀐이후 중장이다.



2년전 군인사법 개정때 해병대사령관 대장 진급을 절대 반대한 국방부 이유는 두가지였다.



각 군에 미치는 영향과 해병대의 작은 규모를 반대의 이유로 들었다.



각 군에 미치는 영향이란 사실 육군에게 주로 해당된다.



해병대 사령관이 대장이 되면 육군의 대장 보직 1~2자리가 위태로워진다.



합참의장, 특히 부동의 육군 몫인 연합사 부사령관 자리를 해병대가 넘볼 수 있다는 위기감이다.



해병대의 작은 규모론(論)은 "2개 사단의 통합 지휘관이면 중장으로 족하다"는 주장이다.



해병대는 포항의 1사단과 김포의 2사단, 그리고 서북도서의 6여단과 연평부대, 제주도의 9여단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북도서방위사령관은 해병대사령관이 겸직)



방어 섹터(Sector)의 규모, 맡은 임무의 중요도로 보자면 해병대 사령부는 대장이 지휘하는 육군 군사령부 못지않다.



서북도서방위사령부도 김포2사단과 합쳐 군단급으로 창설이 예정되었다가,

육군의 수도군단과 임무가 겹친다는 이유로 육군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해병대 사령관이 진급 또는 전직할 수 있는 다음 자리는 대장 직위인 합참의장, 한미연합사 부사령관과 중장이 맡고 있는 합참차장 정도가 꼽힌다.



즉 해병대 사령관 출신의 합참의장, 연합사 부사령관이 나올 수 있게 됐다는 의미다.



단 합참의장의 경우 다른 대장직 1차 보직이후 갈 수 있기때문에, 해병대 사령관 출신으로 가기엔 사실상 불가능하다.



따라서 당분간은 해병대 사령관이 갈 수 있는 직위는 연합사 부사령관, 합참차장 정도일 것이다.



참고로 미국, 영국, 인도네시아, 태국 등 해병대를 보유하고 있는 다른 국가에서도 해병대사령관 임기를 마친 후에도 전직과 진급의 기회가 보장된다.



해병대사령관이 그 직위에서 해임 또는 면직되거나 그 임기가 끝난 후라도 능력이 있을 경우에는 전직, 승진 기용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해병대사령관에게

4성장군을 보임해야 한다는 의견도 많지만,



실현되지 않는 이유는 해병대는 해군 산하의 군조직인데, 해병대와 해군이 동급의 계급을 달게되면 그 순간 지휘체계에 혼란이 오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군단급부대 창설이 우선이다.



서북도서방위사령관을 해병대사령관이 겸직하고 있는데,



서북도서방위사령부를 군단급으로 만드는게 우선 순위이다.



해병대사령관이 옮길 수 있을 대장보직은 한미연합군사령부 부사령관과 합동참모의장이 꼽힌다.



예전에는 연합사 부사령관이 연합 지상구성군사령관을 겸임해 육군 고정보직이었으나, 현재 연합 지상구성군사령관 직을 지상작전사령관이 겸임하는 관계로 육군의 연합사 부사령관 독점에 대한 당위성이 떨어진 상황이다.



연합·합동작전 분야에 상당한 전문성을 보유하고 있는 해병대사령관을 대장급 직위로 진급시키면 군사력 증진에 활용할 수 있다.



해병대사령관외에 다른 중장보직으로 합참보직을 맡은 후 대장 1차 보직인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을 맡으면 대장진급은 가능하지만,



그렇기에 더 위의 보직인 합참의장은 대장이 1차 보직을 거친 후에 올라가는 2차 보직이란 점에서 해병대 출신의 합참의장은 더더욱 가능성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중장 진급이 해군과 기수를 맞춰서 이뤄지기 때문에 중장 보직이 하나밖에 없는 해병대의 특성상 사령관을 지내면 퇴역해야 했다.



육해공 합동 보직인 합참의 중장급 보직인 합동참모차장, 작전본부장, 군사지원본부장, 전략기획본부장이나 국방부의 중장급 보직인 국방정보본부장 등은 의전상 해병대사령관보다 아래이다.



해병대사령관이 중장 최선임 의전으로 정해졌기 때문에, 해병대 사령관이 이쪽으로 보직을 옮긴다면 좌천되는 셈이다.



차라리 의전 서열을 낮춰 합동 보직들을 거친 뒤에 중장 2, 3차 보직으로 해병대사령관으로 보임되면 가능성이 있겠지만,



해당 보직들엔 육군이나 해군, 공군들도 들어가기 힘든데 해병대가 맡기 쉽지 않다.



해병대사령관의 대장 진급의 허용이유가,



육해공군의 합동성과 한미연합작전에 능한 해병대의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자는 것이다.



육해공 합동작전을 꿰뚫어 봐야 하는 합참의장, 한미연합작전을 제대로 이해해야 하는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의 자리도 합동작전과 연합작전의 베테랑 해병대 대장에게 개방해야 한다.



해병대는 육상, 해상, 공중 작전에 익숙하기 때문에 군이 그토록 강조하는 합동성 강화의 키(key) 전력이다.



기본적으로 지상군이지만 함정을 이용해 상륙하는 해상 기반의 전력이다.



상륙을 할 때는 해군의 함포사격 지원, 공군의 폭격 지원을 받기 때문에 해병대 지휘관들은 육해공 합동작전을 깊이 이해하고 있다.



또 한미연합훈련을 가장 많이 하는 부대라서 한미 연합전력 운용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크다.



요즘 같은 평화 분위기에도 한 달에 1~2회 미 해병대와 대대급 훈련을 하다 보니 연합작전능력이 뛰어날 수밖에 없다.



합동성과 연합작전능력을 갖춘 고위 지휘관이 빼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다면 통수권자가 대장으로 진급시키고 합참의장, 연합사 부사령관도 맡겨보아야 한다.



다음 대장급 인사때 대통령의 의식전환을 기대해본다.



이번 김태성해병대사령관 임기중엔

좋은 소식이 있기를 바란다.



※ 해병대사령관 관련 군인사법



해병대사령관은 해병대 장성급 장교 중에서 해군참모총장의 추천을 받아 국방부장관의 제청으로 대통령이 임명한다.



해병대사령관은 재임기간 동안 해병대에서 복무하는 현역장교 중 최고의 서열을 가진다.



해병대사령관의 임기는 2년으로 한다. 다만, 전시·사변시에는 한 차례 연임할 수 있다.



해병대사령관은 그 직위에서 해임 또는 면직되거나 그 임기가 끝난 후에도 진급하거나 다른 직위로 전직되지 아니하면 전역된다.



※ 해병대창설시 자랑스럽지 못한 해병대사령관들



대한민국 해군 창설시에 해군에는 만주군이나 일본군 해군 출신, 일본군 육군 출신 등과, 일본군/만주군 출신이 아닌 민간 상선사관 출신들이 혼재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후 해군에서 해병대를 만들 때, 배에 대해 잘 아는 민간 상선사관 출신들은 해군에 꼭 필요한 주축인력이므로 해군에 그대로 남겨놓고, 배에 대해 잘 모르는 만주군, 일본 육군, 일본 해군 출신들은 대부분 신설 해병대로 몰아넣었다.



그 결과 초창기 해병대 간부들은 대부분 일본군/만주군 출신들로 이루어지게 되었고,



그 영향으로 해병대는 일제 군대 문화의 영향이 유난히 심한 편이었다.



그래서 초대 해병대사령관을 비롯해서 2대, 3대 해병대사령관들도 모두 독립운동가들을 잡아 죽이는 일을 하던 간도특설대의 핵심 멤버들이었다.



※ 자랑스런 해병대사령관



- 제16대 성병문중장(해사 11기)

해병대재창설 주역



- 제4대 김성은 중장(조선해양경비대)

해병대사령관출신 유일 국방부장관



※ 해병대 명칭 부활 공로자

정호영국방부장관



※ 두번 해병대 입대한 사령관



: 제 22대 전도봉 중장



- 원래는 해간35기로 임관했으나 소위 시절 일으킨 해병대 공군비행학교 습격사건에 대한 주동자로서의 책임때문에 조기전역당했다. 이후 재입대하여 해간38기로 다시 임관했다.

-

전도봉중장이 해병대 사령관을 지내던 시절에 국방장관을 지낸 이양호 공군대장은 당시 공군비행학교 당직사령이었고. 사이 좋게 둘 다 뇌물 수수로 처벌을 받았다.



※ 두 얼굴의 해병대사령관



:제5대 김두찬중장

- 신사참배 거부로 옥고를 치룬바 있으며 겸이포제철소 폭파사건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 4.3 사건 당시 예비검속으로 무장대원 및 부역자를 처단하기도 했는데 이 과정에서 민간인 학살을 주도하였다. 2019년에는 김두찬의 이름을 딴 건물이 해병대교육훈련단에 개관되기도 하여 해병대의 역사의식 부재를 보여주었다.



※ 부끄러운 사령관 경질



- 제23대 이갑진중장

: 1사단장 재직시 부대 복지금 3천만원 횡령 사실이 드러나서 사령관에서 경질되었다.



이중 2,000만원을 전도봉 사령관에게 사령부 운영지원금으로 전달, 1,000만원 유용 투서로 경질



- 제22대 전도봉중장



부하장교로 부터 진급청탁과 함께 1억3천만원 상당의 뇌물 수수로 불명예 퇴진



- 제25대 이철우중장



이전 해병대사령관 2명과 함께 부대 공금 횡령 및 뇌물수수 혐의가 인정되었으나, 공금 유용 등이 해병대의 오랜 관행이었고 이미 그 문제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령관직에서 물러났던 것 등이 참작되어 입건유예되었다.



※ 자살한 해병대사령관



: 제11대 이동용중장

1사단장 시절과 사령관 시절에 1사단에 IBS(고무보트)훈련과 공수훈련을 도입한 뒤, 기존 1사단 보병대대들을 고무보트/공수/유격 이 3가지 중 하나로 특성화시켜서 각각 해당하는 훈련을 받는 특화대대 체제로 가자는 구상을 했고, 이에 따라 1974년에 해병대 1사단의 보병 대대들이 기습(IBS)대대, 공정대대, 유격대대로 각각 전환되었다. 이렇게 1사단의 훈련 도입과 편제 개편 면에서는 큰 공적을 세웠으나 개인사적으론 무척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정신분열증에다 간질병을 앓았던 장애인인 아들을 직접 살해한 뒤 운전기사와 함께 아들의 시신을 대청호 호수에 유기하여 실종된 것처럼 위장했지만 얼마 뒤 아들의 시체가 수면 위로 떠올라 발견되고 수사가 진행되면서 유력한 용의자로 수사망이 좁혀오자 결국 자살했다.



※ 해병대사령관 이취임식에도 초대받지 못하고, 군번파인 해병대사령관



제22대 전도봉중장

:

전도봉 해병대사령관은 뇌물수수로 유죄 확정 판결을 받았고, 이로 인해 전직 해병대사령관이 생존해 있다면 반드시 초청받는 해병대사령관 이취임식 초청도 받지 못하고 있다.



전과자는 군번이 파이게 되므로 지극히 당연한 것.



※ 후배들에게 기수열외된 해병대사령관



제30대 유낙준중장

: 해병대사령관이 부하들에게 사실상의 하극상인 기수열외를 당한 적도 있다. 해병대 소장 2명이 해병대사령부보다 더 상위기관에다가 30대 사령관 유낙준 중장을 비방하는 투서를 퍼트렸는데, 군 검찰이 군의 위계질서를 뒤흔드는 하극상이자 음해라고 판단하여 해병대 소장 총원의 무려 절반에 해당하는 두 명의 해병대 소장들을 경질한 뒤 구속했다.



1명은 유낙준사령관과 해사33기 동기생인 홍모소장과 36기인 박모소장이다.



해병대 장교 사회 내부에서 상호간의 알력과 갈등, 암투가 심했음을 보여주는 망신스러운 일화이다.



유낙준사령관은 강화도 총기 난사사건으로 사의표명하여 경질되었다.



※ 해병대사령부 재창설 비화



73년 10월 10일에 해체를 당했던 해병대 사령부가 6.29 민주화 선언이 있었던 그 해 87년11월 1일 부로 재창설이 된 것은 5공화국 말기에 단행한 그 민주화선언이 가져다 준 우연의 선물은 결코 아니었다.



10.26사태로 무너진 유신독재정권을 거쳐 신군부의 집권의 긴 터널을 지나오는 동안 역대 제2참모차장과 해병참모부에서는 사령부의 재창설을 위해 남모르는 궁리와 연구를 해왔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해병대 사령부의 재창설을 위해 군복을 벗을 각오를 하고 문제를 제기했던 사람은 제7대 해군본부 제2참모차장 성병문 중장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휘권을 행사할 수가 없어 전력관리를 제대로 할 수가 없었던 그는 전력 관리상 반드시 개선되어야 할 다음과 같은 7가지 불합리한 요소를 척출하여 그것을 지면에 정리했다.



전문성의 현격한 차이로 인해 제기될수 밖에 없는 제반 문제점을 조목 조목 지적한 것 외에 전시 군수지원 체계상의 중대한 문제점. 통합이 초래한 혼성편성으로 인한 비능률. 고위계급의 축소로 인해 필연적으로 초래되는 진급 확률의 극소화로 인한 자질의 저하와 저능력의 심화.기술군과 체력군의 불구분으로 인한 교육 훈련의 약화 현상. 전통과 사명감의 상실과 사기의 저하. 근무 장소가 다름으로 해서 초래되는 진급심사 등 인사관리상의 문제점 등을 지적한 것이었는데,



이러한 내용의 부리핑 자료가 정리되자 성병문 제2참모차장은 불편한 관계에 있는 해군본부의 동의 없이 여러 단계를 거치지 않고서는 결코 접근하기가 어려운 군부의 실세들, 이를 테면 보안사령관과 함창의장 국방부장관 등의 군부요인을 보안 유지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가운데 끈덕진 노력 끝에 차례로 내방하여 인쇄물 에 적힌 그 문제점들을 브리핑을 통해 조목 조목 설득력있게 설명함으로써 해병대 사령부가 없어선 안 되겠다는 필요성을 공감하게 했고,



지성이면 감천한다는 말이 있듯이 그러한 노력을 지속적으로 경주한 끝에 성병문 중장은 자신의 제2참모차장 임기를 1개월 앞둔 86년 8월 전두환대통령과 육사 11기 동기인 이기백 국방장관이 전 대통령으로부터 해병대 사령부를 재창설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합참의장으로 있을 때부터 여러 차례 성병문 장군의 공식적인 방문을 받았고, 또 성 장군의 브리핑에 공감을 했다고 말하는 전 국방장관 이기백 장군의 증언에 따르면 자신이 대통령에게 진언을 할 때 해병대 사령부를 재창설 하게 되면 대선 때 해병대의 현역과 예비역을 합쳐서 100만표는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농담을 곁들이긴 했지만 본시 기질에 포용력과 결단력이 있는 전두환 대통령이 그 시기에 그러한 결정을 내린 것은 자신의 임기 중 전투역량을 최대한 강화하여 전쟁공포로부터 국민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소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13대 대통령 선거일을 45일 앞둔 87년 11월 1일 해병대 사령부의 역사적인 재창설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었다.



다음 이야기는 해병대 사령부 재창설 계획이 완성단계에 이르렀을 때 거론이 된 신사령부의 명칭과 관련된 비화이다.



당시 해군 본부에서는 신 사령부의 명칭을 (1)해군상륙군사령부 (2)해군해병사령부 (3)해군해병상륙군사령부 등 3가지로 정하여 그 중의 하나를 택하게 할 계획이었으나,



그 안건이 합참 전략회의 석상에서 거론될 때 의견제시를 요구받은 박구일 중장이 해군본부에서 제시해 놓은 3가지 명칭이

다 좋은 명칭이지만 '해병'이라고 하면 개개인을 뜻하지 조직체가 아니므로 '해병대'로 표현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 것이 공감을 불러 일으켜 합참에서는 '해군 해병대 사령부'로 단일화 하여 장관 결재에 회부하자



정호용 국방장관은 해병대의 전통과 해병대 장병들의 사기를 고려해서 옛날 명칭 대로 '해병대 사령부'로 고쳐 대통령의 재가를 받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청와대에서 재가를 받던 날 마지막 브리핑을 했던 박구일 제2참모차장은 브리핑이 끝난 후 "좋았어!"하며 흔쾌히 결재서류에 서명을 한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세가지 특별 지시를 받고 두 눈에 눈물이 핑 돌만큼 감격했다고 한다.



첫째 공부를 많이 하여 상륙작전의 전략을 개발하라. 둘째 김포에 주둔하는 2사단을 2년마다 교체하여 상륙전훈련을 시켜라. 그렇게 하지 않는 다면 육군과 같은 지상군 부대가 되고 말 것이다. 셋째 해병대 대원들이 싸움박질을 너무 많이 하지 않도록 해라. 적과 싸울 때 용감하게 싸워야 되지 않겠는가.



이상이 그 세가지 지시사항이었고, 이 지시사항을 전장병에게 교육을 통해 철저히 주지시키라고 했다고 하니,



잔인하게 머리와 팔 다리를 죄다 잘라 없애 버리고 몸통만 남겨 놓은 박정희 대통령의 처사에 비한다면 참으로 감읍할 일이 아닐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박구일 장군은 그로부터 1주일 후 국방부에서 개최된 전군 지휘관회의 석상에서 국방부의 브리핑이 끝난 후의 건의사항 시간에 정호용 장관이 할 말이 없느냐고 물었을때 얼마나 그 일을 고맙게 여기고

있었던지 "요새 170만의 현역과 예비역 해병가족들은 매일 청와대를 향해 큰 절을 올리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전두환 대통령을 위시한 전 군의

지휘관이 참석해 있는 그 자리를 폭소의 도가니로 화하게 했다고 하며,

2차장으로 취임한 후 약 1년 간 불철주야로 노심초사했던 박구일 장군은

그가 사령관으로 취임한 후 그 3가지 지시사항을 브리핑 차트에 정리하여 40일 간에 걸친 예하부대 초도순시 때 철저한 교육으로 주지시켰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만약에 그때 정호용국방장관이 '해병대'란 명칭을 되찾아 주지 않고 해군본부에서 정해 놓은 그 세가지 명칭 중의 하나를 택했다고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듯 필시 기쁨도 반감되고 신명도 반감되는 결과를 초래했을 것이다.



사령부가 재창설된 날짜는 87년 11월 1일 이었다. 해병대가 수난을 당한 73년 10월 1일 그 날로부터 14년 1개월 9일 만에 우리 해병가족들은

몽매지간에도 잊지 못하고 있던 '해병대'란 그 이름과 '해병대 사령부'란 그 명칭을 소리 내어 불러 볼 수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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