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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처절할수록 더 아름다운 것 같아요

류종중 2021. 7. 25. 12:29




. “저와 같은 장애인들에게 희망을 불어 넣어주고 싶은 마음에 ‘희망 만들기 원정대’란 타이틀을 걸고 고산 등반을 하고 있어요.

그에 앞서 우선 저한테 희망과 꿈을 심어주고 싶어요. 장애인으로서의 불편함을 이겨내고 장애 전보다 더 잘할 수 있다는 것을 제 자신에게 보여주고 싶은 거예요.

그게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어요.

삶은 처절할수록 더 아름다운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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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홍빈의 영광의 순간들

‘세계 최초’ 장애산악인 김홍빈, 14좌 완등!

7.18일 오후 4시 58분(파키스탄 시간) 브로드피크 정상 등정
2006년부터 가셔브룸2봉부터 15년 걸려

세계사에 빛나는 기분 좋은 소식을 접한지
몇시간 만에 충격의 비보를 접했다.

김홍빈 대장은 카라코람 산맥의 8,047m 높이의 브로드피크(Broad Peak)를 등정하고 하산하던 도중 절벽에 빠진 것으로 여겨진다.

열 손가락 없는 장애 산악인 김홍빈(56) 대장이 18일 오후 4시 58분(한국 시간 오후 8시 58분)에 브로드피크(8,047m)를 등정하며 히말라야 8,000m급 14좌를 완등하는 데 성공했다. 장애인으로서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한 건 세계 최초의 기록이다.

비장애인까지 포함하면 한국에서는 7번째, 세계에서는 44번째다.

한국은 이로서 이탈리아와 나란히 14좌 완등자 최다 보유국이 됐다.


‘2021 김홍빈의 브로드피크 원정대’와 브로드피크 베이스캠프 소식통에 따르면 김홍빈 대장이 이끄는 브로드피크 원정대가 현지 시간 18일 오후 4시 58분(한국 시간 오후 8시 58분)에 브로드피크 정상에 성공했다고 전했다.

정상 공격조에는 정득채 대원과 임디아즈, 후세인, 유습, 마하디 등 4명의 고소 포터가 함께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2주 동안 전진 캠프를 설치며 고소 적응을 마친 원정대는 17일 정상 등정을 목표로 지난 14일 본격적인 등정을 시작했다. 원정대는 16일 캠프3(7,100m)까지 진출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후 심한 적설량과 크레바스로 기존에 계획했던 7,500m 지점에 캠프4를 설치하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외국 원정팀은 캠프3에 머문 반면, 한국 원정대는 이들의 캠프3보다 해발고도가 100m 더 높은 7,200m지점에 캠프4를 건설하는 등 정상 등정을 위한 투지를 보여줬다.


잠시 숨을 고른 원정대는 17일 저녁 11시(한국시간 18일 오전 3시) 캠프4를 나서 정상을 향해 출발, 18시간 연속 등반을 펼친 끝에 칼날처럼 이어진 1.8㎞의 서쪽 능선을 통해 브로드피크 정상에 올랐다.


장애인 세계 최초로 14좌를 완등한 김홍빈 대장은

출국 전 “코로나로 모든 국민들이 힘든 상황”이라며 “이번 원정이 피폐해진 국민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주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또한 “한국을 넘어 전 세계에 ‘장애인도 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선사하고 싶다”며,

“마지막 봉우리라고 해서 욕심을 내진 않을 생각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보답은 정상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안전히 집으로 귀환하는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즐겁고, 안전하게 살아 돌아오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김홍빈 대장은 7대륙 최고봉과 히말라야 14좌 완등을 장애인 산악인 최초로 성공한 산악인으로 1991년(당시 28세) 북미 최고봉 매킨리 산(6천194m) 단독 등반 중 동상으로 열 손가락을 모두 잃게 됐으며 장애인이 된 이후에도 장애를 극복하고 산악인 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1997년 유럽 최고봉 옐브루스(5642m) 등정을 시작으로 같은 해에 아프리카 최고봉 킬리만자로 산(5895m), 1998년 남미 최고봉 아콩카과(6962m)와 북미 매킨리를 등정했다.

결국 2009년, 7대륙 최고봉을 13년 만에 완등했고 히말라야 13좌를 차례로 올랐다.

2006년 가셔브룸2봉부터 시작한 히말라야 14좌 완등 릴레이를 15년이 지난 올해 성공했다.

장애인으로는 세계 최초의 기록이다.

* * 마지막 산행 일지

- 7.17일 오후 11시 30분(현지 시간)
: 김홍빈대장 베이스캠프(캠프4)에서 정상으로 출발

- 18일 오후 4:58분
: 정상 등정, 하산 출발

- 19일 0시
: 김홍빈대장 하산시 크레바스에서 조난

- 19일 5:55분
: 김홍빈대장 한국 광주산악회에 위성전화로 구조 요청, 러시아 구조팀 수색 시작

- 7.19일 11시경
: 7,900m지점 크레바스 아래 15m 지점에서 김홍빈대장 발견,
의사 소통 원할치 않아 구조 어려움.
구조도중 얼어 있던 등강기(주마)가 끊어지면서 80° 경사 크레바스아래로 추락

- 러시아 등반대가 크레바스에서 빠진 김 대장을 발견, 손까지 흔드는 등 의식이 있는 것까지 확인,
구조대원 1명이 내려가 물을 제공한 뒤 구조 활동을 펼쳐 15m 정도 끌어올렸지만, 줄이 헐거워지면서 아래쪽으로 추락.


* 사고 구조 일지


“완등기 고장 나 또 추락”, DAWN 닷컴의 사고 경위 주목할 만 "

히말라야 브로드 피크(해발 고도 8047m) 등정에 성공함으로써 히말라야 8000m급 14좌 완등에 성공한 김홍빈(57) 대장이 다음날 하산하다 실종된 지 일주일째가 됐다.
구조소식이 들려오지 않고 있다. 사실
돈(dawn) 닷컴 등은 김 대장이 사망했다고 확신하고 있다.

산악스키로 하산하려던 러시아 원정대 DZF(Death Zone Freerider)의 안톤 푸고프킨과 비탈리 라조는 17일 정상 공격 시작 시점부터 19일 밤 베이스캠프 귀환까지 자신들의 일정을 시간 단위로 소셜미디어에 밝혔다고 월간 산이 원문에 충실하게 옮겨 눈길을 끈다. 두 사람은 김 대장의 등강기가 고장난 것이 2차 추락의 원인일 것으로 보며, 이들은 80도의 수직 벽에서 추락해 김 대장이 살아 있을 확률은 1%라고 내다봤다.

17일 밤 11시 DZF 팀은 캠프3(해발 고도 7100m)에서 정상 공격을 시작했다. 김홍빈 등반대 등 다섯 팀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상 예보에 좋은 날씨는 딱 이틀이었기 때문에 모두가 서두르고 있다.

18일 오후 4시 30분 DZF 팀 소속의 푸고프킨, 라조, 토마스 로네(노르웨이)는 정상 등정을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1시간 30분만 더 가면 정상에 도달할 수 있지만, 이대로라면 어둠 속에서 하산해야 한다.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하산을 결정한다.

18일 밤 8시 DZF 팀은 캠프 3로 하산해 일주일 후 다시 정상 등정을 시도하기로 결정했다. 그 시점에 김홍빈 대장과 러시아 등반가 아나스타샤 루노바 등 정상을 등정한 그룹은 하산을 서두르고 있었다.

19일 0시 메시지가 수신됐다. 7900m 지점의 안부(col)에서 루노바가 추락했다는 소식이다. 김 대장도 위급 상황이란 소식도 거의 동시에 전달됐다.

19일 0시 15분 즉각 푸고프킨과 라조가 구조를 위해 출발했다. 캠프3에 있던 다른 등반가들은 추가 의약품과 산소통을 모았다. 루노바는 근처 고소(高所) 포터들에 의해 크레바스에서 벗어났다. 큰 부상 없이 복귀했다.

19일 새벽 4시 푸고프킨과 라조는 하산 중인 루고바를 만났다. 음료수와 고산병 치료제인 덱시메타손을 전달한 뒤 푸고프킨은 루고바를 캠프3로 인도하고, 라조는 무전기와 산소를 갖고 김 대장을 구조하러 떠났다. 루고바는 캠프3에서 휴식을 취한 후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베이스캠프에 안전하게 도착했다.

19일 오후 1시 30분 (앞선 보고서에선 오전 11시에 라조가 김홍빈 대장을 찾아 구조 작업을 시작했고, 구조 당시 김홍빈 대장이 의식이 있었다는 내용이 있었으나 이번 보고서에선 누락됐다) 루고바를 캠프3에 데려다준 푸고프킨이 라조가 구조 작업을 하는 현장에 도착했다. 라조는 크레바스 속으로 20m 가량 하강해 김홍빈 대장을 확보(anchor)했다. 그 뒤 김 대장은 스스로 등강기를 활용해 올라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순간 김 대장의 등강기가 고장 났다. 그리고 김 대장이 등강기를 고치려고 움직이는 순간 김 대장이 80도 각도의 벽에서 추락했다. 덩달아 라조도 5m가량 추락했다. 김 대장은 99%의 확률로 그가 즉사했다고 말할 수 있다.

19일 오후 5시 20분 푸고프킨과 라조가 캠프3에서 하산을 시작했다. 눈보라가 다가오고 있어 스키도 종종 활용해 신속히 하산했다.

19일 밤 9시 16분 DZF 팀 모두가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돈(dawn) 닷컴의 20일 기사도 사고 경위를 나름 잘 정리하고 있어 원문에 충실하게 옮긴다.

국내 언론이 보도했듯이 김 대장은 위성전화를 통해 광주시산악연맹 등에 “밤이 늦었다. 밤새 내내 낙담한 채로 있었다. 아주 춥다”고 말했다. 연락관(LO)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 18일 오후 8시쯤 루노바가 하산하다 크레바스에 떨어졌다. “그녀의 몸이 로프에 매달려 있어 15명 이상 산악인들의 하산을 막았다. 캠프3에 내려온 사람들이 구조하러 올라갔다. 다음날 새벽 2시 45분 그녀는 무사히 크레바스를 빠져나왔다. 15분쯤 뒤 그녀는 캠프3에 당도했다. 김 대장은 이때 낙담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해서 다른 구조대가 조직됐다.”

두 영국인 피터 브리틀튼과 폴 에서리지, 두 러시아인 푸고프킨과 비탈리 라조, 고소 포터 무함마드 후사인, 모함마드 유사프, 임티아스 사드파라가 김 대장을 찾아 나섰다. “오전 11시쯤 비탈리가 중국쪽 사면 위의 크레바스 아래 추락한 김 대장을 발견했다. 해발 고도 7800m 지역이었다.”
김 대장은 로프에 매달려 있었지만 위로도 아래로도 움직이지 못했다. 하지만 “의식도 있었고 반응도 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했다. 구조하려고 하는데 김 대장은 언어 장벽 때문인지 제대로 따라주지 못했다.

“구조하는 중 어느 순간, 김 대장은 구조 로프에서 떨어져 나갔다. 곧바로 추락해 가파른 중국쪽 사면 아래로 사라졌다. 비탈리와 구조팀은 사면의 위쪽을 찾았으나 어떤 흔적도 찾지 못했다. 이곳 사면에서 떨어지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이 구조팀의 판단이었다.”


* 인고의 시간

“고산등반을 제대로 하려면 스키를 탈 줄 알아야 한다”는 선배의 말을 듣곤 스키도 열심히 탔다. 그는 89년 동계 전국체전에 출전, 노르딕 개인전 2위에 입상하고, 그 해부터 91년 초까지 사격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바이애슬론 부문에서 1,2,3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매킨리 등반에서 열 손가락을 잃은 홍빈에게는 냉혹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옷을 마음대로 입는 것은 물론 대소변조차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게 낫겠다 싶어 약국 앞까지 다가섰던 게 수십 번이었다. 이런 위기를 넘어서는 데는 선후배들의 도움이 컸다. 함께 살며 밥을 떠 먹여주는 것은 물론 대소변도 받아주었다.
선배의 권유로 장애인용 운전면허증을 따내 자동차 부품제조업체에 화물차 운전사로 근무하기도 하고, 전산실에서 근무해보기도 했다. 골프장에서 포크레인 등 특수장비도 다뤄봤다. 하지만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모든 직업이 오래 가지 못했다.

“특수장비는 잘 다뤘는데도 신체적 결함 때문에 자격증을 따지 못했어요. 정말 힘들었어요. 그래서 이렇게 지낼 바엔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에 전념하자 마음먹었어요. 그게 산이었고, 첫 번째 목표가 7대륙 최고봉 등정이었어요.”

97년 여름, 김홍빈은 멀쩡한 산악인도 해내기 어려운 목표를 세웠다.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8,848m.아시아)를 비롯, 아콩카과(6,959m.남미), 매킨리(6,194m.북미), 킬리만자로(5,895m.아프리카), 엘브루즈(5,642m.유럽), 칼스텐즈(4,884m.오세아니아), 빈슨매시프(4,897m.남극) 등 세계 7대륙 최고봉을 모두 오르겠다는 계획이었다.

한동안 대부분 터무니없는 계획이라며 아무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는 빙하를 가로지르고 설벽을 넘어서면서 보란 듯이 목표를 하나하나 달성했다. 97년 봄 일본 다테야마(3,015m)에서 가능성을 확인하고, 그 해 여름부터 엘브루즈를 시작으로, 98년 여름 매킨리에 이르기까지 4대륙 최고봉을 올랐다.

2000년 봄 에베레스트에 도전했다. 그러나 첫 도전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후 2002년 매킨리 등정에 성공해 10년 만에 한을 풀었다.

뿐만 아니라 김홍빈은 장애인 스키 선수로도 활약했다. 2000년 동계 전국체전 알파인 회전스키 장애인부에서 2위에 입상한 그는 장애인 스키 국가대표로서 2002년 미국 솔트레이크 동계 올림픽과 2005년 오스트리아 티롤 IPC 유러피언컵 대회 등 2006년 국가대표 유니폼을 반납할 때까지 국제대회를 무려 9회나 참가했다.

* 히말라야

아시아 대륙의 남부에 위치한 산맥으로, 네팔·인도·파키스탄·중국·부탄에 걸쳐 있다. 히말라야 산맥에는 해발 8000m가 넘는 고봉들이 많은데, 이 중에서도 높은 봉우리 14개를 가리켜 '히말라야 14좌'라 한다.

히말라야(Himalayas)는 고대 산스크리트(梵語)의 눈[雪]을 뜻하는 ‘히마(hima)’와 거처를 뜻하는 ‘알라야(alaya)’가 결합되어 생긴 말로 '눈의 거처' 즉 '만년설의 집'을 의미한다. 네팔, 인도, 파키스탄, 중국, 부탄에 걸쳐 있는 대습곡 산맥인 히말라야 산맥은 북서쪽에서 남동 방향으로 활 모양을 그리며 뻗어 있다.

* 히말라야 14좌

히말라야 14좌는 히말라야의 8,000m급 봉우리 중에서도 하늘의 별에 견줘 '자이언트'로 불리는 높은 봉우리들 중 14개를 지칭한다. 여기에는 에베레스트(8,848m), K2(8,613m), 칸첸중가(8,588m), 로체(8,518m), 마칼루(8,463m), 초오유(8,201m), 다울라기리(8,169m), 마나슬루(8,165m), 낭가파르밧(8,128m), 안나푸르나(8,092m), 가셔브롬1·2봉(8,070m, 8,036m), 브로드피크(8,048m), 시샤팡마(8,046m) 등이 있다. 이 봉우리들은 대다수가 네팔, 파키스탄과 중국 국경지역에 있으며 시샤팡마는 중국 티베트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에베레스트산라고 표시한 이유는 현지명을 모르는 인도를 통치하던 영국의 인도측량국이 네팔의 고산지역을 측량할때 공이 컸던 측지학자 애베레스트의 이름을 땄다.

높은 봉우리 순으로 K1,k2~식으로 붙이는 이유는 ,
영국의 인도측량국이 카라코롬의 영문 이니셜인 k자를 붙여서 측량한 봉우리에 K1,K2식으로 이름을 붙였기 때문이다.

8,000m급 고봉 등정에 처음으로 성공한 것은 1950년 프랑스 원정대의 안나푸르나 등정이다. 그리고 프랑스 원정대에 의한 '인류 최초의 8,000m급 등정'이 달성된 지 3년 후인 1953년, 영국 원정대가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했다. 히말라야 14좌 완등에 처음으로 성공한 것은 1986년 오스트리아의 라인홀트 메스너(이탈리아)이다.

* 히말라야 14좌 등정 성공한 한국인 7인

박영석, 엄홍길,한왕용,김재수,김창호,김미곤,김홍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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