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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사투리 인드라,인드라야의 뜻

류종중 2021. 8. 22. 15:49


※ 경상도 사투리 인드라,인드라야의 뜻

1.

* 인드라
  : 이 놈, 이 친구. 경상북도 영일지방 사투리.
* 인드라야! : 이놈아!
* 인드라들 : 이놈들
* 인드라들아! :  이놈들아!

2.  이 녀석,  이 사람의 경상도 사투리.
친구나 아랫 사람에게 쓰는 말.
약간 하대하는 표현. 친한 사이에서만 할 수 있는 표현으로 친근함을 은근히 보여주는 표현이기도 함.

3. 경상도에서
인드라야 : 이놈아
인드라야 : 이녀석아를  나타내는 인드라의 어원

인드라, 인드라야는 산스크리트에서 온 말이다.
산스크리트어

इन्द्रadj.indrachiefइन्द्रadj.indrabestइन्द्रadj.indraexcellentइन्द्रadj.indrafirstइन्द्राf.indrAwife of indra - indrANIइन्द्रm.indraregent of the east quarterइन्द्रm.indralord of the sky and atmosphereइन्द्रm.indranightइन्द्रm.indraprinceइन्द्रm.indrapupil of the right eyeइन्द्रm.indranumber fourteenइन्द्रm.indratwenty-sixth division of a circle on the plane of the ecliptic [Geom.]इन्द्रm.indragod of the atmosphere and skyइन्द्रm.indrahuman soulइन्द्रजाadj.indrajAdescended from indra


힌디어
सुर राज  
신의 왕(Indra).

인도네시아어

indra 

* 왕 (=raja)

* 제석천(帝釋天), 인타라(因陀羅)((우뢰나 미를 주관하는 베다교의 주신의 이름: 우주를 지배함))

4. 혹자는 경상도 사투리 인드라야를 이렇게도 풀이 한다.

인드라야~
이녀석들아~
>인석들아야~
>인들아야 > 인드라야

5. 경상도 사투리 인드라, 인드라야의 의미를 찾는데,

어원이 머나먼 인도 산스크리트어에서 유래됐다는 설에서 그 역사적 근거를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에 쓰여있는 처용가에서 추리해 보았다.

서울 밝은 달밤에 / 밤늦도록 놀고 지내다가 / 들어와 자리를 보니 / 다리가 넷이로구나. / 둘은 내 것이지만 / 둘은 누구의 것인고? / 본디 내 것(아내)이다만 /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

위는 삼국유사에 기록된 처용(處容)이 불렀다는 노래이다.

처용이 밤늦도록 서울(경주)을 돌아다니며 놀다가 집에 들어가 보니 자기 잠자리에 웬 다른 남자가 들어와 아내와 동침을 하고 있었다. 처용은 화를 내기보다는 이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고 물러 나왔다.

그러자 아내를 범하던 자가 그 본모습인 역신으로 나타나서 처용 앞에 무릎을 꿇고 그의 대범함에 감동하여 약속을 하나 하였다. 처용의 형상이 있는 곳이면 그 문안에 절대 들어가지 않겠다고 맹세한 것이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처용의 얼굴을 대문 앞에 그려 붙여 역신의 방문을 피했다고 한다.
역신이란 전염병을 의미한다. 처용의 이 설화로 인해 민간에서는 처용의 얼굴을 문에 붙여 한해의 병을 피하고자 하였고, 제웅 혹은 처용이라고 하여 짚으로 인형을 만들어 길에 버려 액을 막았다.

궁중에서는 섣달그믐날 처용의 얼굴을 한 탈을 쓰고 처용무를 추는 나례(儺禮)를 행함으로써 나쁜 기운을 막고 전염병을 쫓고자 하였다. 관아에서도 매년 한해를 시작하기 전 처용탈을 쓰고 처용무를 추는 것을 의례로 하였다.
처용무는 처용의 이야기가 전해오는 신라 말엽부터 고려를 거쳐 조선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이어져 내려온 우리나라 전통의 춤이다. 처용탈의 생김새는 조선시대 악학궤범의 기록에 자세하게 남아 있어 비교적 충실하게 그 원형이 보존되어 있다.


처용의 탈은 그 얼굴 생김이 다른 가면에서 볼 수 없는 몇 가지 특성들이 있다. 얼굴의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다소 험상궂으며 얼굴색은 한국 사람과는 다른 붉은색으로 정해져 있다.


성현(成俔, 1439~1504)의 용재총화에도 처용탈이 붉고 이가 희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처용탈의 피부색은 붉은색으로 줄곧 이어져 왔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처용은 그 생김부터 상당히 특이했던 인물이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근 천 년 이상을 이어져 내려온 잡귀를 쫓는 상징인 처용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처용에 대한 기록은 삼국유사에 남아 있다.

어느 날 대왕이 개운포(開雲浦, 학성 서남쪽에 있는데, 지금의 울주다)에서 놀다가 돌아가려 하였다. 낮에 물가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길을 잃고 말았다. 왕이 괴이하게 여겨 신하들에게 물으니 일관(日官)이 아뢰었다.

“동해(東海) 용의 조화입니다. 마땅히 좋은 일을 해주어 풀어야 할 듯합니다.”

그래서 왕은 일을 맡은 관원에게 명하여 용을 위해 절을 세우도록 하였다. 왕이 명령을 내리자 구름과 안개가 걷혔기 때문에 그곳을 개운포라 불렀다.

동해의 용이 기뻐하며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왕 앞에 나타나 덕(德)을 찬양하며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하였다. 그 중 한 아들이 왕을 따라 서울로 들어와 정사를 도우니, 이름은 처용(處容)이라 하였다. 왕은 아름다운 여자로 처용의 아내를 삼아 머물도록 하고, 급간(級干) 관직도 주었다.

삼국유사에서는 처용을 용의 아들이라고 하였지만, 용은 왕족의 은유적인 표현일 것이다.

당시 신라에 내왕하던 아라비아 왕족출신 상인일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처용탈의 생김이 매우 이국적인 것과 고려사악지에 기록된 처용의 모습을 볼 때 그가 외국인일 가능성은 꽤 큰 듯하다.

신라 현강왕이 학성에 갔다가 개운포로 돌아왔을 때, 홀연히 한 사람이 기이한 몸짓과 괴이한 복색을 하고 임금 앞에 나아가더니, 노래와 춤으로 덕을 찬미하고 임금을 따라 서울로 들어갔다. 그는 자기를 처용이라 불렀으며 언제나 달밤이면 시중에서 노래 부르고 춤을 추었으나, 끝내 그가 있는 곳을 알지 못하였다. 당시 그를 신인이라 생각하였다. 후세 사람들이 그 일을 기이하게 여겨, 이 노래를 지었다.

기이한 몸짓과 괴이한 복색에서 그가 신라인이 아니라 외국에서 들어온 사람일 거라는 추측을 하는 것이다.

실제 헌강왕 시절 동해의 울주 지역은 번화한 항구였고 삼국사기에 헌강왕 때 보로국(寶露國, 여진)과 흑수국(黑水國, 말갈) 사람들이 신라와 통교를 청하기도 하였으며, 중국 당나라와 일본과의 교섭을 꾀하기도 하였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이 시기 국제적인 교류가 꽤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처용을 무역을 하러 온 아라비아의 상인으로 추측하는 의견이 많은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 꽤 흥미로운 학술적 발견이 이루어져 이때까지 미스터리로 남아 있던 처용의 출신을 밝힐 가능성이 커졌다. 고대 페르시아의 서사시 쿠쉬나메에 신라와 관련된 기록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쿠쉬나메는 ‘쿠쉬의 책’이란 의미이며 쿠쉬는 이 서사시의 주인공이자 영웅이라고 한다. 이 서사시에는 7세기 중엽 멸망한 사산왕조 페르시아의 유민들 이야기가 다루어지고 있는데 지도자인 아비틴이 바닷길로 유민들을 이끌고 신라로 와서 정착했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한다.

이 이야기에서 아비틴은 신라왕의 환대를 받고 마침내 신라 공주 프라랑과 결혼하며 둘 사이에 태어난 왕자 파리둔이 후일 아랍군을 물리치고 조상의 원수를 갚는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뒷부분만 빼면 처용의 설화와 상당히 비슷한 부분이 많다.
쿠쉬나메는 11세기경에 만들어져 구전되다가 14세기에 필사되었으며 그 원본은 영국에 소장되어 있다.
쿠쉬나메에 나오는 영웅 아비틴이 신라에 온 시기가 헌강왕 무렵으로 되어 있고 삼국유사이외에 삼국사기에도 기이한 차림의 사람들이 헌강왕 때 나타난 기록이 있다.

5년 3월에 왕은 나라의 동쪽 지방의 주 군에 행차하였다. 이때 알지 못하는 사람 4명이 어전에 나타나서 노래하고 춤추는데 그 모양이 괴이하고 의관도 다르므로 사람들이 말하기를 ‘산해(山海)의 정령’이라 하였다.

이를 볼 때 처용은 아비틴 혹은 아비틴을 따라온 유민 중 한 사람일 가능성이 있다.

더불어 신라의 고분에서 출토되는 페르시아산으로 보이는 부장품들도 이러한 국제적 교류의 결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처용설화에 나타난 처용의 얼굴 모습이 일반적인 우리 민족의 얼굴과는 많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까만 얼굴에 푹 들어간 큰 눈과 높은 코는 신라 사람이라기보다는 서역인(아라비아인)과 비슷하다. 이처럼 동해 바다에서 왔다는 처용 설화에 대한 해석과 처용 탈에 나타난 처용의 모습을 보고 학자들은 처용이 서역인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괘릉에는 무덤을 지키는 신하의 모습이 조각된 석상들이 있는데 그 중 곱슬한 머리카락과 수염, 큰 코와 부리부리한 눈을 가진 옛날 서역인의 모습을 한 서역인의 상이 있다. 이 서역인상으로 미루어볼 때 신라는 서역인들이 자주 왕래하고 살기도 하였던 나라였을 것이다.

유시민 전장관이 오만문화부장관의 접견자리에서,
오만 장관이 오만에 신라라는 섬이 있다는 것을 주장하며, 이의 근거로 처용이 오만출신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오만의 마시라라는 섬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6. 이 아라비아 상인들이나 처용에 의해 그들 사이에서

신라 왕을 지칭할때,
인드라라고 불렀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된다.

이 용어가 신라인들 사이에 상대방을 높여서 부르는 용어로 유행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 이후 1,00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인드라라는 말은 친한 사이에서 사용하는 약간 하대하는 이 녀석의 뜻으로 변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상대방을 지칭할때 이 양반아 ! 하고 말하는 것과 같이 말이다.

인드라의 어원이 산스크리트에서 온 경상도 사투리라면 ,
이 아라비아 상인들한테서 왔을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생각이 되고,

처용을 통해 그 당시에 지금의 울산항이 국제항으로써 외국과의 교역이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이는 개인적인 의견일 뿐임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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