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시작전권 ☆
1. 송영길 민주당 대표 전시작전권 회수 주장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18일 아프칸 사태를 빗대어 주한미군이 철수하면 우리나라도 아프칸 꼴이 날 것이라는 한 미국 언론인의 주장에 대해 SNS에 '북한의 남침 가능성 일축과 함께 전시작전권 조기 전환'을 주장을 했다.
한편 한국 국방부가 지난 2월 발간한 ‘2020 국방백서’는 군사력에 있어서 한국은 양적으로, 북한은 질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다며 북한은 이 같은 양적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재래식 무기 성능 개량과 함께 핵과 WMD, 미사일, 장사정포, 잠수함, 특수전부대 등 비대칭 전력 증강에 몰두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또 미 국방부는 바이든 행정부 출범 이후에도 "조건에 기초한 전작권 전환은 한미 양국이 상호 동의한 것일 뿐 아니라 우리의 병력과 인력, 그리고 그 지역의 안보를 보장하는 데도 필요하다"는 입장을 유지해왔다.
그러나 송대표는 한미 동맹관계를 튼튼히 유지하면서도 국방력강화 전작권회수를 통해 강력한 자주국방의 의지와 능력을 더욱 키우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전시작전권에 대해 알아 보고자 한다.
2. 전시 작전권
전시 작전권이란
유사시 군의 작전을 통제할 수 있는 권리이다.
작전권은 군 전체의 작전을 통제하고 지휘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이는 평시작전통제권과(평상시의 지휘권) 전시작전통제권(전쟁이나 전투시의 지휘권)으로 나뉘는데, 현재 평시작전통제권은 한국군 합창의장에, 전시작전통제권은 한미연합사령관에게 있다. 다시 말해, 평상시에는 전체 지휘권이 한국군에게 있지만, 전시에는 미군에게 있다.
3. 전시 작전권 회수 진행 상태
일반적인 경우에 각 나라는 군 통제권을 스스로 가지고 있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한국 전쟁 시절, 모든 지휘권을 미군에게 넘겨주었다. 이후 지난 2007년 2월, 노무현 전 대통령 재임시절, 본격적으로 미국과 협상이 시작되었다. 당시에는 2015년 12월 1일까지 전시작전권을 한국이 돌려받기로 합의 했지만 우리나라의 정치, 군사적 상황으로 인해 계속해서 지연되고 있다.
군사적 상황이란
대통령이 바뀔 때 마다 전시작전통제권 환수에 대한 입장에 변화가 있다. 또한 우리 군이 전시작전권을 제대로 돌려 받으려면, 현재 미군이 많은 부분에서 도움을 주고 있는 여러 무기체계를 우리가 보유하고 있어야 하는데, 아직 무기 도입이 완료되지 않았다.
4. 전시 작전권 미군(연합군)에 위임 이유
※ 한국전쟁시 전시작전권 이양
- 50.6.25 한국전쟁 발발
- 3일만에 수도 서울 함락.
- 6·25전쟁 초기 1950년 7월 14일자로 이승만 대통령은 작전지휘의 일원화와 효율적인 전쟁지도를 위해 유엔군사령관에게 보낸 서한을 통하여 국군의 작전지휘권(작전통제권)을 이양했다. 이에 따라 미 제8군사령관에게 한국 지상군의 작전 지휘권을 이양하였으며, 해·공군도 각각 극동 해·공군 구성군사령관에게 이양하였다. 이로써 한국에서 공산군과 싸우는 모든 부대의 지휘통일이 이루어졌다. 이는 1953년 10월 1일 체결된 한·미 상호방위조약과 이에 의거하여 1954년 11월 17일 합의한 ‘합의의사록’에서도 그대로 유지되었다.
* 그러나 한국전쟁중에 미군에게 위임된 전시작전권은 다시 한국군에게 재위임되어 ,
군단,사단,연대,대대에게 재위임되어 한국군이 군사작전을 스스로 할 수 있었다.
그러던중 현리전투이후
이 전시작전권은 미군이 다시 회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현리전투
* 요약
1951년 5월 16일부터 5월 20일까지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현리 일대에서 국군 제3군단과 중국군 제9병단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 결과
- 군단 궤멸
- 60% 군단 인원 포로 및 사망
- 차량 및 대포등 중화기 70% 길에 버려 나포됨
- 군단장 경비행기타고 도망
- 사단장이하 장교들 계급장 떼고 도망
- 병들 총버리고 산속으로 도망
* 영향
5월 25일 유엔군 총사령관은 현리 전투 패배의 책임을 물어 국군 제3군단을 해체했으며, 대한민국 육군본부의 작전권도 박탈했다. 이로써 육군본부의 역할은 인사·행정·군수·훈련으로 제한되었으며, 국군에 대한 지휘권은 완전히 유엔군에게 넘어가게 되었다.
* 6.25때
지휘관이 부하들은 내팽기 치고 도망간 대표적인 전투가 두번 있었다.
그런데 그 지휘
관은 똑같은 사람이었다.
- 50.6 : 7사단장
- 51.5 : 3군단장
- 동두천 전투
연천 동두천 의정부지역 방어 7사단장은 유재흥이다.
부하들은 전차에 밀려 후퇴하면서 ,
맨몸으로 특공작전을 하는데,
사단장은 회의 간다고
거짓으로 핑계대고 헬기타고 후방으로 도망가 버렸다.
수많은 군인들의 사망과 포로 발생,부대기 망실 되었다.
그로 인해
서울은 3일만에 함락되었다.
- 현리전투
현리전투는 우리나라 3대 패전 전투이다.
임진왜란때 칠천량전투,
병자호란때 쌍령전투,
6.25때 현리전투이다.
51.1.4후퇴후,
다시 3.14일에 서울 재탈환후 중공군의 5월공세로 인해 전선 교착상태일때,
강원도 현리 일대의 전투때,
화력이 부족하거나,
전력이 부족한게 아닌데도 불구하고,
군단이 전멸하고,
부대원 24,000명중 60%가 포로 및 사망,
도망가느라 차량, 포등 중화기 70%를 길바닥에 버려 상실함.
물론 군단기,사단기등 부대기도 다수...
이후 아군 무기로 아군이 죽는 어처구니 없는 사례가 되기도 했다.
이때 군단장은 경비행기타고 후방으로 도망,
사단장이하 장교들 계급장 떼고 도망.
병들은 총 버리고 산속으로 며칠간 굶주리며 도망가 평창 후속부대에 40%만 합류했다.
이 사건은 미군 지휘관들이 한국군 장교의 작전능력을 철저하게 불신하게 된 계기였다. 당시 밴 플리트 미8군사령관은 한국군의 1군단을 제외한 모든 군단 사령부를 해체하고, 일체의 작전권을 미군 장성들에게만 부여하였다. 1군단 또한 육군본부를 지휘선 상에서 제외하고 미군 사령부에서 직접적인 지휘를 받도록 하여, 이 시점부터 모든 한국군의 작전권이 상실되었다.
• 이유 : 군 지휘관들이 저 살라고 도망가 버려 믿을 수가 없어서...
이때 3군단장이 바로 유재흥이다.
(이승만대통령이 전시작전권을 미군에게 위임했는데,
이걸 다시 한국군 부대에 다시 위임했던
전시작전권을)
미군사령관은 바로
한국군 각 군단,사단, 연대,대대에 있던 전시작전권을 전부 회수해 버리고,
미군 장성의 지휘에 따라 전쟁을 수행하게 하였다.
현리 전투 중 밴플리트 미8군 사령관과의 다음 대화는 아직까지도 유명하며 현리에서의 국군의 치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밴 플리트 : 유 장군, 당신의 군단은 지금 어디 있소?
유재흥 :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밴 플리트 : 당신의 예하 사단은 어디 있소? 모든 포와 수송장비를 상실했단 말이오?
유재흥 : 그런 것 같습니다.
밴 플리트 :유 장군, 당신의 군단을 해체하겠소. 차라리 다른 일자리나 알아보시오!
유재흥은 아버지도 일본 육군대좌이었고,
철저한 친일파 정치군인이었는데,
한국말을 할 수 없는데도 사단장 군단장을 역임한 최악의 군인이다.
* 유재흥의 한국전에서의 대표적인 지휘
- 1950.6 육군 제 7사단 궤멸 (사단장)
- 1950.7월 육군 제 2군단 덕천전투에서 전멸(군단장)
- 1951.5 육군 제 3군단 현리전투 궤멸후 해체(군단장)
유재흥은 4.19때 정군대상이어서 중장예편하였으나,
5.16이후 대사등을 역임하다가,
유재흥을 박정희대통령은 그후 국방부장관으로 임명한다.
단지 일본 육사선배라는 이유때문이었다.
50.7.14일에 이승만대통령이 임시로 전시작전권을 위임했다가,
현리전투이후 완전히 넘어 가고
70년이 지났는데도
못 찾아 오고 있는 실정이다.
미국 입장애서는 미국의 국익입장에서 스스로 반환할 이유가 하나도 없고,
보수세력들은 전쟁시 미국의 소극적인 개입을 우려해서 안할려고 한다.
유재흥은 1990년대 이후 전시 작전통제권 회수 등의 국방 관련 현안에 대해 친미 성향의 보수 세력과 정치적 행보를 같이 하여 대한민국 국군의 작전통제권을 미군에게 일임하자는 데 큰 역할을 하여 많은 비아냥을 사기도 하였다.
2004년 노무현대통령이 미군으로부터 전시작전권을 회수하겠다고 발표하자 예비역 군 장성 2명이 반대성명을 발표하는데 그 성명의 대표자가 바로 유재흥이었다.
노무현대통령때 전시작전권 얘기하니 예비역장성들이 반대하길래,
장성들 앉혀 놓고,
노무현대통령이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 하고 호통치던 장면이 떠오른다.
☆ 한국사 3대 패전 ☆
* 칠천량해전
1597년(선조 30) 7월 15일 원균(元均)이 지휘하는 조선수군이 칠천량에서 참패한 해전이다.
임진왜란ㆍ정유재란중 조선수군이 유일하게 패배한 해전이다.
원균이 이끌던 조선 수군이 일본군에게 대패한 전투로, 한국사 졸전 중에서도 최고 수위라고 할 만한 황당한 패배이다. 세계사를 봐도 이 정도로 황당한 졸전은 손에 꼽힐 만할 것인데, 판옥선의 성능은 일본의 세키부네보다 훨씬 우수했고 거북선 역시 많은 양이 있었으며, 탑재화기도 천지현황 총통 등으로 일본보다 훨씬 화력이 강했다. 더군다나 병력 수도 밀리지 않았고, 질도 다수의 전투에서 승리한 베테랑급 전력이었지만, 현실은 대참패였다. 사실 이순신의 대단함을 떠나 그냥 원균 자체가 장수로서의 자질이 있는지조차 의심되는 졸장이라는 걸 보여준 전투다.
그 결과
조선 수군의 제해권 상실, 정유재란의 확전
* 쌍령전투
병자호란 때인 1637년 1월 28일 경기도 광주의 쌍령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청나라 군대에 포위되어 남한산성에 고립되어 있던 인조(仁祖)를 구하기 위해 상경한 경상도 근왕군(勤王軍)이 청나라 군대와 싸워 크게 패한 전투
조선군은 청나라 군대보다 훨씬 많은 병력을 지닌 상태에서도 잘못된 병력 배치와 전투 준비로 궤멸되는 피해를 입었다.
* 현리전투
1951년 5월 16일부터 5월 20일까지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현리 일대에서 국군 제3군단과 중국군 제9병단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절반 이상의 병력과 장비를 잃는 큰 피해를 입었다. 이는 한국전쟁 기간에 나타난 최악의 패전 사례로 알려져 있으며, 제3군단이 해체되고 육군본부가 작전권을 빼앗기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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