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호물자 옥수수빵
☆ 구호물자 옥수수 빵 ☆
처남이 자투리땅에 심은 옥수수를 수확했다고 맛보라고 한박스를 택배로 보내왔다.

기쁜 마음으로
택배상자를 뜯자 마자
몇개를 껍질을 까고
솥에다 삶았다.
인터넷을 뒤져 삶는 방법을 검색하고,
소금과 설탕을 적당량 넣고 삶는다고 삶았지만, 중불로 30분을 더
삶으라는 것을 대충 좀만 삶아 그러는 것인지,
기대했던 고소하고 찰진 옥수수맛이 아니고,
약간 딱딱하다.

아 ! 뭘 잘못했지 하고 인터넷을 뒤져 보니,
새로운 옥수수에 대한
상식도 알게 되고,
옥수수에 얽힌 추억도 생각난 행복한 시간을 갖게 되었다.
옥수수가 덜 여문 상태에서 옥수수를 삶아야지 고소하고 부드럽고 찰지지만,
너무 여문 옥수수여서
그런가 보다 하고 위안하고,
알맹이를 하나씩 떼어내서 밥에다 얹어 옥수수밥을 해먹기로 했다.

옥수수를 무리하게 힘만 주어서 알맹이를 떼어 내다 보니,
오른손 엄지손가락에 물집이 생겼다가 터져버렸다.
1. 옥수수

옥수수는 한해살이풀로서,
원산지는 아메리카로 영국,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아메리카 대륙을 정복한 이후에 유럽으로 갖고 와서 전 세계에 퍼지기 시작했다.
옥수수는 볼리비아를 중심으로 한 남아메리카 북부의 안데스산맥의 저지대나 멕시코가 원산지인 것으로 추정되며 우리 나라에는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었다.
따라서 그 이름도 중국음의 위수수[玉蜀黍]에서 유래하여 한자의 우리식 발음인 옥수수가 되었고, 다시 지방에 따라 옥시기·옥숙구·옥수시·옥쉬이 등으로 불리고 있다.
옥이 우수수 떨어진다고 옥수수라 불렀는지도 모른다.
참고로 비슷한 수수는 전라도에선 쭈시,쑤시라고 불렀다.
사탕수수와 비슷한 단옥수수를 단쭈시라고 부르며 옥수수대를 씹고 다니기도 했다.
옥수수를 강냉이라고 부르는 것도 중국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중국 강남에서 재배한 것이라고 했던 것에서 유래해서 우리식으로 강냉이라고 불리었다고 한다.
옥수수대는 2~3m 정도의 높이로 크게 자라며 대 하나에 위 아래로 걸쳐 옥수수가 4~5개 정도 달린다.
옥수수는 암꽃과 수꽃이 따로 피는 식물이다. 옥수수 수염이라고 부르는 것이 옥수수의 암꽃이며, 옥수수대 위쪽에서 피는 벼처럼 달리는 이삭이 수꽃이다.
바람이 불면 수꽃의 꽃가루가 바람을 타고 날아가 암꽃에 들러붙어 수정한다.
쌀과 밀을 압도하는 단위면적 당 생산량, 높은 지방 함량(=높은 칼로리), 짧은 수확기간을 지녔으며(60일~300일),
토질, 수질을 가리지 않아 척박한 환경에서 세심하게 관리하지 않아도 잘 자란다.
게다가 쌀이나 밀과는 달리, 복잡한 가공 과정이 없으며,
삶아서 먹거나 구워서 먹을 수도 있고 ,
기름도 짜낼 수 있으며,
가루를 내서 밀가루처럼 면이나 빵을 만드는 등 여러모로 유용한 작물이다.
옥수수는 산간지방에서는 주식이 되기도 하고, 평지에서는 간식으로 이용된다.
특히, 생산량이 많은 강원도의 경우에는 강냉이밥·강냉이수제비·강냉이범벅과 같은 주식 뿐 아니라, 옥수수설기·옥수수보리개떡과 같은 별식 등 옥수수를 이용한 다양한 종류의 음식이 발달되어 있다.
특히, 옥수수로 만든 올챙이묵은 강원도의 향토음식으로 유명하다.
이 밖에 제분을 해서 빵·과자·물엿·술을 만들며,
녹말로는 포도당·주정·방직용풀 등을 만든다.
기름을 짜서 쓰기도 하고 마가린을 만들기도 한다. 민간에서는 마른 암술대를 이뇨제로 사용한다.
옥수수를 심으면 연작은 가능하면 피해야 하고, 휴경지를 길게 보내야 한다. 그나마 콩이 옥수수를 재배한 토지에 질소와 영양분을 다시 공급해주는 기능이 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옥수수를 강낭콩, 호박과 같이 심는 농법으로 지력을 보충하였다.세 자매(Three Sisters)라고 하는 농법인데, 원리는 간단하다. 옥수수를 지지대 삼아 자라게 하면 콩을 따로 지지대를 만들어 줄 필요가 없고, 콩은 질소를 고정하여 옥수수가 소모하는 지력을 회복하며, 바닥에 깔린 호박은 토양에 자연그늘을 형성하여 잡초가 자랄 빛을 차단함과 동시에 토질에 영양분을 제공한다.
이런 상호 작용은 실제로 놀라운 생산력을 발휘하여 완전 바위 절벽에 살던 아나사지 유적지에서도 큰 문제 없이 식량을 공급했을 정도다. 말이나 가축화한 소의 부재로 새로운 땅을 경작하는데 한계가 있었던 북미 원주민 입장에서는 극강의 효율을 자랑하며 수세기 동안 먹고 살게 해 준 고마운 발견이다.
2. 옥수수 생산과 가격 변화
옥수수는 바이오연료, 사료, 과당, 식품, 골판지 등의 원료로 쓰인다. 돼지 사료의 원료가 되는 옥수수 가격의 급등은 육류 가격도 올릴 수 있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생산되는 곡물이다.
생산량 1위 국가는 농업대국 미국이고, 2위는 중국이다.
미국 중부에 길게 걸쳐있는 대규모 농업지대를 팜벨트(Farm Belt)라고 하고, 그중에서도 미국 중북부 아이오와, 일리노이, 인디애나, 미시간, 미주리 주에 걸쳐있는 대규모 옥수수밭 지대를 콘벨트(Corn Belt)라고 한다. 특히 콘벨트의 대표주자인 아이오와는 미국 내 옥수수 생산량의 20%를 차지하는 말 그대로 옥수수 나는 주다.
옥수수 생산량의 대부분은 사료와 에탄올 생산에 쓰이는데(70%), 전기차 시대가 열리면서 대체 단백질과 전기차의 등장으로 수요가 줄어들 위기에 놓였다.
옥수수가 아닌 옥수수 종자, 농화학 등 생산에 필요한 요소들만 해도 시장규모가 수십조에 달한다.
그러다보니 아이오와의 옥수수 농장주들은 미국 연방정부의 농업정책과 보조금, 옥수수 수매량에 따라 자기들 수익이 몇 년간 널을 뛰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정치권에 줄을 대서 농업부문에 정부 지원이 끊기지 않도록 로비한다.
그 결정체가 바로 미국의 차기 대통령 후보를 결정하는 최초의 경선장인 아이오와 코커스이다.
그리고 옥수수와 대두는 서로 연관성 있는 농작물이고, 미국은 세계적인 대두 수출국이기도 하다.
그 대두를 처리하는 것까지 농장주들은 로비로 해결하고, 미국 정치권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전 세계 곡물 무역시장에 영향을 미친다.
이 때문에 미중 무역전쟁으로 대두 수출이 막혀 정치권이 비상이라든지,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옥수수 8조 원어치 구매를 약속했다느니 하는 뉴스가 정치쟁점화되는 것이다.
기후를 크게 따지지 않고 성장하는 것이 장점으로 꼽혔기 때문에, 라틴 아메리카 이외의 지역에서는 가축의 사료로 써먹을 목적으로 도입했다.
옥수수가 동물 사료로 각광받는 건 비단 재배 효율이 높아서만은 아니다.
당분이 많아 가축이 살이 잘 찌기 때문에 육용으로 가축을 키우는 입장에서는 가장 효율이 좋은 사료라고 한다.
미국에서 옥수수생산량이 너무 많아지면서 처치곤란의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사료나 바이오에탄올에 대한 시도가 급증했다.
바이오 에탄올을 가솔린의 대체에너지로 사용하려는 시도는 미국뿐 아니라 ,
브라질에서도 똑같이 과잉생산된 옥수수 처리용으로 계획된 아이디어다.
그래서 브라질의 초기 계획은 생산하는 기계나 자동차류를 에탄올로도 가동이 가능한 하이브리드로 만들어 가솔린 값이 오르면 에탄올로 기계를 돌리고, 옥수수 가격이 오르면 가솔린으로 기계를 돌린다는 계획을 실현했으나,
가솔린 가격이 오르니 덩달아 에탄올 수요가 늘고, 에탄올 수요가 늘자마자 옥수수 가격이 올라가면서 국민들이 먹을 옥수수마저 없어지는 현상이 일어났다.
게다가 옥수수를 주식으로 삼는 아프리카 국가들은 자국 옥수수를 죄다 선진국들이 에탄올 연료로 써먹는다고 수입해가는 터에 식량난에 빠지기도 했고 민심이 폭발하자, 많은 아프리카 국가들은 이대로 가다가 민중 폭동이 벌어진다고 부랴부랴 옥수수 수출을 취소하기까지 했다.
미국 역시 옥수수를 연료로 쓰려다가 그 여파로 돼지의 사료로 쓰던 옥수수값 인상에 의해서 돼지고기값까지 인상되고 말았다. 이 탓에 벤치마킹하자던 소리가 쏙 들어갔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옥수수 본체가 아닌 버려지는 옥수수 대등을 이용한 에탄올 연구에 착수하게 되었다.
다만, 미국은 쇠고기를 더 많이 먹는 편이라서 돼지고기값 상승이 크게 물가에 영향을 주지는 않았고, 여전히 미국은 옥수수 과잉생산이 심각한 정치문제다.
그런데 최근의 가뭄과 한파등 기후변화에 따른 또다른 문제가 생겼다.
옥수수 가격이 치솟는 이유는 기본적으로는 수요·공급 불균형이다.
기후변화에 따른 작황 불황에 옥수수 시장 공급량이 줄었다.
전세계 옥수수 생산량의 45%, 교역량의 80%를 차지하는 미국의 옥수수 농장에 태풍과 한파가 찾아와 작황에 타격을 입었다.
미국에 이은 옥수수 최대 수출국인 브라질·아르헨티나도 엘니뇨·라니냐의 영향으로 작황이 부진했다.
또한 코로나19에 따른 해상운임비의 상승, 달러화 강세 등도 옥수수 가격 상승을 이끄는 요인이다.
중국의 사료용 옥수수 대량 수입은 수요 측면에서 옥수수 가격을 올리고 있다.
중국은 전세계 돼지고기 소비량의 50%를 차지하는 세계 최대 돼지고기 소비국가다.
사육하는 돼지 두 수만 해도 약 4억 마리에 이른다. 이 돼지들이 먹는 사료의 주 원료가 옥수수다.
3. 옥수수 종류
* 찰옥수수
일반 옥수수보다 크기가 작으면서도 찰진 맛으로 사랑을 받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찰옥수수도 맛있지만 뻥~ 하고 터지는 뻥튀기도 온국민의 간식이다.
고소하고 찰진 찰옥수수로 여름철 간식을 해결할 수 있다.
껍질은 선명한 녹색이고
알은 쫌쫌하고, 수염은 갈색인 것을 구한다.
냉동보관하면 더 찰진옥수수를 먹을 수 있다.
주로 산간지역에서 잘 자란다.
* 대학 옥수수
괴산출신인 최봉호 전 충남대교수가 1991년 고향의 땅 ,기후에 맞는 품종개발에 나서
12년만에 종자를 개발해 시험재배후 시장에 내놓았는데 대박을 터트려 , 주민들이 고마워 대학 옥수수란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충북 괴산군에서 괴산대학찰옥수수 재배 지역을
별도로 선정해서 특별 품종관리하고 있다.
괴산대학찰옥수수는 얇고 길면서
새하얀 백색 단단한 알갱이들이 촘촘히 박혀있는 게 특징 이라고 한다.
* 초당 옥수수
먹는 사과는 8~14 브릭
배는 10~12브릭 정도의 당도수치를 가지고 있는데,
초당옥수수는 15브릭 이상의 당도를 가지고 있고, 수분이 70%수준이라 생으로도 먹기 편하다.
초당은 지명이 아니라 당도가 월등히 높다는 뜻이다. 그만큼 단맛이 강하다. 초당옥수수는 일반옥수수와 달리 생으로 먹을 수 있으며, 달달함을 초월해 파인애플같은 강한 단맛에 수분이 70%에 달해 과즙이 풍부하며 식감이 아삭아삭한 것이 특징이다.
이마트의 지난 6월말 초당옥수수 판매량은 전년동기 대비 132.1% 증가했다고 한다. 가히 폭발적인 인기다.
간식용 풋옥수수 가운데 당도가 가장 높은 옥수수이다. 씨알이 쭈글쭈글하고 발아율이 낮은 편이지만, 당분의 함량이 높다. 생식용과 냉동용으로 이용된다.
수확한 뒤 3일 이내 곧바로 이용하는 것이 단맛도 높고 신선도도 좋다. 익혀 먹을 때는 물에 삶지 말고 수증기로 쪄야 단맛이 저하되지 않으며, 설탕이나 소금 등의 첨가물을 넣으면 특유의 맛과 향을 잃게 된다.
4. 구호물자 옥수수빵
구호물자를 잘 나타내는 시 한편을 소개합니다.
그때를 기억하십니까?
송곡. 김형예. 作
책 보자기 양어깨에 둘러메고
신작로 길 달려갈 때
등 뒤 빈 도시락통
박자 맞추며 덜거덕거리고
검정 고무신 새끼줄로 동여매고
돼지 오줌통으로 공차기할 때
힘껏 찬 돼지 오줌통보다
더 멀리 날아간 검정고무신 한 짝,
그대여! 그때를 기억하십니까?
분유 가루 옥수숫가루
구호물자 한 보자기 책보에 얻어 싸고
고갯마루 한 마루 넘어갈 때마다
분유 가루 한 움큼 입안에 털어 넣고
단숨에 고갯길 뜀박질로 넘어가고
구수한 옥수수빵 가득 싣고 온
세 발 달린 빵 차 주변 둘러서서
꼴딱꼴딱 군침 삼키던
그대여! 그때를 기억하십니까?
겨울이면 옹기종기
호롱불 밑에 모여 앉아
무랑 김치랑 보리밥 덩이 훔쳐다 먹고
무 방귀 보리밥 방귀 온 방 가득 풍기면서
아이엔 그라운드 나무 이름 대기
뽕나무도 짝짝~ 밤나무도 짝짝~
그대여!!
정녕 그때를 기억하십니까?
1950년대에 들어서
미국의 옥수수와 밀등의 농산물 호황으로 가격이 급락하자,
이의 처치를 위해 정부에 로비와 압력을 통해,
국가에서 잉여 농산물을 수매해 자유진영국가중 빈국에 지원하게 된다.
수매 농산물의 이미지 제고와 미국과 우방국간 경제적 교류 강화는 물론 미국제품의 수출과 무기 수출의 일환이었다.
대한민국은 해방 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1970년대까지 식량 자급에서 자유롭지 못한 나라였다.
이 어려운 시기에 국민들의 배고픔을 달래준 게 바로 밀가루 음식이었다. 미국의 무상원조 '악수표 밀가루'로 국민들은 빵과 수제비 등을 만들어 먹으며 배를 채웠다. 이렇게 밀가루 음식이 대중화하면서 우리 식생활에도 엄청난 변화를 일으킨 게 사실이다.
당장의 배고픔을 면하는 데는 밀가루가 최고였으니 '악수표 밀가루' 등으로 수제비 만들어 먹던 그 시절을 기억하는 세대에게 수제비는 별식이 아니라 배고픔의 상징이다.
'악수표 밀가루'란 또 무엇인가?
구호물자 밀가루 포대에는 태극기와 성조기 아래 악수하는 두 손이 인쇄돼 있었다.
종이가 귀했던 그 시절 그 포대를 찢어 교과서 표지를 싼 학생들도 많았다.
밀가루 외에 옥수수가루와 분유도 구호물자로 많이 제공되었고 이에 따라 옥수수가루로 만든 죽이나 빵도 배고픔을 달래는 데 요긴했다. 학교 급식 빵도 구호물자 옥수수가루가 주 재료였다.
초등학교 2학년때
학교뒤에 가면 임시로 만든 시설이 있었다.
옥수수빵을 만드는 곳이었다.
일반 제과빵이 아닌 두부같은 떡 같은 옥수수 빵이었다.
칼로 잘라 학생수에 따라 배급하던 빵이었다.
바케스를 가지고 가면 반별로 옥수수가루로 만든 두부 모양의 빵을 담아주었었다.
문제는 학생수에 비해 숫자가 절반정도밖에 안되었다.
그것도 매일 부정확했다.
선생님이 손으로 반씩 나누어 한명씩 줄을 서서 나오라고 해서 나눠줬다.
그러다 보면 몇개 남기도 했었다.
선생님이 가져갔던 것 같다.
1학년때는 옥수수빵에 대한 기억은 없고,
옥수수죽 냄새를 맡았었던 것 같기도 하고,
누나와 형이 책보에 싸와 가져온 노란 옥수수가루를 먹었던 기억도 있다.
3학년에 올라 가니 구호 물자가 바뀌었다.
학교에서 옥수수가루로 빵을 만들어 주는게 아니고,
제빵회사에서 만든 빵을 세발 자동차 삼륜차로 배달해 오면 나누어 주었다.
학년이 올라 가고,
나이가 한살 더 먹었다고
선생님이 반장에게 급식을 맡기셨었다.
여기서 완장의 힘이 나타났다.
처음엔 개인당 빵을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어느날부터
반장말을 만들었다고,
청소를 제대로 못했다고,
빵을 반장 마음대로 지급을 했다.
어떤 놈은 제대로 하나,
어떤 놈은 반쪽만,
어떤 놈은 빈손.
반장 혼자만 교탁앞에 서서 지급했다면 반항이라도 했을텐데,
그것도 대단한 권력이라고,
반장의 친위세력이 등장하고 부터는 아무 반항도 못했다.
그 친위세력들은
반장과 같은 동네에 살거나, 등하교때 같이 만나는 반장 옆동네 친구들 대여섯명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놈들은 남은 빵 여러개를 들고 가서, 마을 어귀 언덕길 그늘에 앉아 자기들끼리 빵을 나눠 먹었다고 한다.
3학년 2학기때는
희한한 유행이 돌았다.
빵부스러기에 월남벌레라고 하는 애벌레를 키우는 놀이였다.
누군가가 시작했는지,
어디에서 왔는지는 몰라도 먹다가 남긴 빵부스러기 속에서 자라나는 애벌레를 키우는 재미에 다들 즐거워 했다.
여름에 그늘밑에서 참나무에 붙어 있는 풍뎅이를 잡아,
못 날라가게끔 안 죽을 만큼만 목을 살짝 반 비틀어 놓고,
다리를 전부 떼어 내고선,
풍뎅이를 뒤집어 땅바닥에 놓고서는,
풍뎅아! 풍뎅아!
헌집 줄께 새집 다오!
두꺼비 노래도 가져다 부르고,
풍뎅아 ! 풍댕아 !
우리 집 앞 마당 깨끗이 쓸어 다오.
고통에 젖어 뒤집힌 몸을 빙빙 돌리며 날개짓 하는
풍뎅이를 갖고 놀더니,
어느새 관찰하는 어린이로 성장해 갔다.
4학년이 되니,
구호 물자가 바뀌었다.
빵에다가 우유를 하나씩 주었다.
삼각형 비닐봉지에 담긴 우유였다.
신세계 맛을 알았다.
그런데
한두달후 선생님이 설문조사를 하셨다.
만약에 우유를 공짜가 아니고 한달에 30원에 돈주고 사먹으라고 하면 사 먹을 사람 손들어 봐 ! 하고 물으셨다.
이사람 저 사람 눈치를 보니,
아무도 손을 안들었다.
그러다가
한두달후엔 우유급식이 끊겼다.
5학년이 되니
우유뿐만이 아니라 빵 급식도 끝나버렸다.
빵을 먹을려면 한달에 얼마간의 돈을 내야 한다고 해서, 다들 안 먹겠다고 해서,
아니 먹을 수가 없어
공짜 급식 빵이 없어졌다.
하기야 고학년이 되니 한달에 30원씩 내야 하는 육성회비를 못내고,
뻔히 사정을 알면서도 오후에 남아 선생님한테 언제까지 낼지 약속하고 다짐 받아야 했고,
변소청소도 별도로 해야 하는 형편인데,
돈내고 빵 사먹을 처지는 아니었다.
아니 집에가서 말을 했다가는 몽둥이로 다리가 부러졌을 것이다.
1953년부터 이루어 졌던
구호급식시대가 1972년도 없어졌는데,
섬 같은 우리 시골보다 더 오지인 곳이 1년 더 급식시대였다.
삼각형 비밀봉지 우유는 그후 6년이 지나 광주에 고등학교에 진학하고서야 발견했다.
서울 우유 !
미국 농산물 원조의 대부분은 밀·옥수수·설탕·원면·담배 등과 그에 대한 가공물이었다.
한국전쟁 후 국내 경제는 이를 재차 가공·판매하는 경공업 위주의 삼백(밀가루·설탕·면직물)산업을 발달시켰다.
우리 나라 정부는 도입한 미국산 농산물을 민간에 불하하며 얻는 수입을 미국과의 협정에 따라 방위비로 전환했다.
이 수입액은 주한미군 관련 예산에 쓰이거나, 군수물자 도입에 활용됐다.
미국의 의도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이후 우리나라는 농어촌 근대화에 나서는 한편, 경제개발계획을 착착 실천해 경제강국의 꿈을 실현해 갔다.
결국 미국의 농산물 원조는 점차 줄어들었고, 1981년엔 마침내 미국 대사가 '농산물 원조 폐지'를 선언하며 '원조'란 말을 역사의 장으로 넘겼다.
아울러 한국은 몇해 전부터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빈국에 원조를 하는 국가로 바뀌는 등 괄목할 성장을 이뤘다.
오늘 저녁 톡톡 터지는 고소하고 찰진 옥수수밥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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