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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릉 제기 술잔에서 떠오른 아버지에 대한 추억

류종중 2023. 5. 31. 22:30


두달전에 동기들과 트레킹을 했었는데,
벌써 기억이 가물거리길래,
예전 사진을 들쳐보며 일기를 적는다.

2023. 3.26(일)일에 군대동기들과 세종대왕릉 트레킹을 하기로 했다.

아침 10시에 경강선 세종대왕릉역 (신분당선 판교역출발)에서 만나기로 했다.

경강선 전철 이동시간은
- 신분당선 판교역 ~ 세종대왕릉역
- 44분 소요
- 20분 간격이어서 접근이 용이했다.

트레킹 시간은
세종대왕릉 산책을 40분 정도하고,
세종대왕릉역 ~ 여주역
(2시간)까지 트레킹을 하고 ,
( 트레킹 거리 : 10km),

점심을  오후 1: 30분경에,
여주역 부근 맛집에서 하기로 했다.

세종대왕릉역에 도착하니,
두명이 차를 가지고 오는데,
20여분 늦는다길래,

그럼 이리 오지말고
세종대왕릉에서 기다리라고 하고 ,
우리끼리 세종대왕릉으로 걸어가기로 했다.

가는 길에 도로공사를 하고 있어서,
안내길이 끊겨 혼선이 생겨 버렸다.

무심코 경험있는 안내자 동기만 따라가다 보니, 여주체육관등을 지나쳐 걷나가 아닌가 보다 하고, 그제서야 네이버지도를 조회해서 반대로 걷다 보니,
안내 표지 띠가 나온다.
바로 여강길 안내 띠이다.


여강은 여주를 흐르는 남한강이다.

굴다리를 지나 마을을 지나 한적한 곳에 이르니 ,

안내하던 동기가 이쪽으로 오라길래 가보니 ,
잘 단장된 묘가 있다.


묘의 비석을 보니
충의공 이인손의 묘이다.


묘앞에서 조용찬동기가 이인손의 묘에 얽힌 야사를 얘기해주길래 감명깊게 들었었고,
세종대왕릉에서 향토사학자 같이 학식이 풍부한 다른  동기 김상균동기가 그에 대해 야사가 사실과 다르다는 부연설명을 해주어,
나중에 집에서 인터넷으로 확인을 해보게 되었다.

묘옆엔 종가집 고택이 있다.


1. 충의공 이인손의 묘

세종대왕의 릉은 처음엔
지금의 서초구 내곡동(헌릉)에 있었으나,

세종승하후 10년사이에,
세종승하(1450),
문종승하(1452),
단종승하(1457),
의경세자 요절(1457)
인성대군요절(1463)등 비극이 어어지자 이곳의 터가 좋지 않다는 의견이 일어,

이미 있는 다른 사람의 명당의 묘를 옮기게 하고,

세종 승하 19년만에 예종1년에 현재의 여주로 옮겨 영릉이라 했다.

배산임수(背山臨水)라 하여 뒤로 산을 등지고 앞으로 물을 내려다보는 지세를 갖춘 터가 명당의 기본이라던데, 여강이 그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왕릉이 자리하자 당시 지명이었던 여흥군은 인접해 있던 천령현(川寧縣)과 합쳐져 현재의 이름 여주로 승격된다. 

원래 지금의 영릉자리는
잘 나가는 대가집 문중의 묘자리였다.

세종대왕의 영릉은 명당으로 유명한 것 만큼이나 여러 말들이 전하고 있다.

그중에 대표적인 말이 광주이씨 우의정 이인손의 묘와 한산이씨 이계전의 묘가 있었다는 설이다.

『예종실록』 2권, 예종 즉위년 12월 27일자에 "천릉할 땅을 여흥 성산의 이계전의 분묘로 정하고 술자리를 베풀다”라고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한산이씨 이계전의 묘라는 주장은 예종실록 기록을 근거로 하고,
이인손의 묘라는 주장은 광주지역 사람들의 주장인데,

이곳에 이인손의 묘가 있었다는 주장이 계속해서 제기되는 배경에는, 지창룡의 『한국지리총람』 명당찾아 삼천리(1977, 295-302쪽)에 기록된 내용에 의해 왜곡된 것이라고 한다.

지창룡은 원래 이곳에 이인손의 무덤이 있었는데, 이 터를 잡아준 지관이 다리를 놓지 말고 재실도 짓지 말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후손들이 지관의 말을 듣지 않고 다리와 재실을 지었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어, 영릉터를 찾으러 왔던 지관들이 비를 피하러 재실에 와서 이인손의 묘가 명당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영릉터로 정하게 되었다는 그럴싸 얘기를 한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자창룡 선생은 전혀 터무니 없는 말을 한 것일까?

그것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이인손의 무덤은 세종대왕의 영릉 터에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근처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예종실록』 기록에 따르면, "이인손(李仁孫)의 분묘(墳墓)는 이계전(李季甸)의 분묘 옆에 있다”

"이인손(李仁孫)의 무덤은 영릉의 청룡(靑龍) 북쪽에 있다”고 적고 있다.

이계전의 묘자리에 천릉을 했는데,
일정 범위내의 묘는 전부 이장을 해야하기에 ,
이인손의 묘도 동시에 같이 이장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라 생각된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을 참조하면 된다.

세종대왕에게 묏자리 내준 한산이씨와 광주이씨 가문
- https://naver.me/F2w8OixN

세종대왕에게 묏자리 내준 한산이씨와 광주이씨 가문 - 세종대왕신문

[세종대왕신문=이재우] 조선왕조의 대표적인 천하명당 묏자리로 삼척 준경묘와 여주 세종대왕릉(영릉)을 꼽는다. 해동육룡 중 첫 번째 용인 목조 이안사의 아버지 이양무 장군의 묘(준경묘)에서

www.sejongking.co.kr



묘를 지나 간판을 보니 세종대왕면이다.


큰길을 찾아 아스팔트길을 걷는데, 도로옆 어느
집옆에  소나무 분재가 20그루 정도 있는데,
어떻게 만드는지 전부 하트모양이다.


고개를 넘으니 멀리 세종대왕릉 입구가 보인다.
40여분을 걸어 왔다.

2. 세종대왕릉 쉼터 차(?)한잔

세종대왕릉 커피숍에서 에서 기다리는 동기 2명을 만났다.

세종대왕릉으로 걸어가는데 ,

영릉이
세종대왕과 왕비를 모시는 영릉(英陵)과 효종과 왕비를 모시는 영릉(寧陵)두개가 같이 있다고 한다.

소나무길로 연결된 효종의 영릉을 먼저 들르기로 했다.

왕의 숲길인데 700m 산책길이 잘 가꾸어져 있었다.


산책길을 걷다가
왼쪽에 설치되어 있는
지붕이 있는 쉼터를 발견했다.


효종의 영릉으로 오는 사람들이 한명도 없었다.

쉼터의자가 넓게 만들어져 있어서,
돗자리 두개를 깔고,
신발을 벗고 7명이 올라가도 될 정도로 넓었다.

가지고 간 커피와 과일들을
먹다가,
마침 막걸리 한병이 베낭에 있어서 ,
종이컵에 따라 주위 눈치를 보며 조용히 건배를 했다.

지나는 이 아무도 없고,
종이컵에 과하지 않게 가벼운 막걸리 한컵이라 그다지 마음에 걸리지는 않았다.

릉에서 술을 마시는게 아니라 능으로 가는 길 숲속 쉼터에서 가볍게 곡차한잔으로 마음을 달랜다는 어거지 위안을 마음속으로 했다.

20여분쯤 얘기를 나누다가,
효종 영릉엔 들르지를 않고,

세종 영릉으로 향했다.


영릉은 조선시대 왕릉중 최초의 합장릉이라고 한다.

영릉입구엔
해시계, 물시계등 세종시대의 찬란한 과학기구들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눈으로만 쓸쩍 지나치고
영릉으로 향했다.

가다 보니 정자각이 보이는데,
제향을 올리는 건물은 정(丁)자 모양으로 생겼대서 정자각이라 부른다. 정자각에 계단이 세군데 있는데, 가운데 왕이 오르는 계단과 신하가 오르는 계단을 구분한다고 한다.


하긴 국회의원이나 회장이 타는 엘리베이터도 서로 다르니 예나 지금이나 격을 구분하는 것은 같다.

언덕을 올라
영릉에 올랐는데,
영릉에 못들어가게 입구를 통제를 했다.

측면으로만 영릉을 보며
7명 단체 사진을 찍었다.


정면을 보니
명당은 명당이구나 하는 소리가 나게끔 전망이 좋았는데 대기하는 사람이 많아 사진을 찍는 것을 잊어 버렸다.

영릉을 내려와
과거 재실을 보니 책방으로 바뀌어 있고,


새로 지은 재실이 있어
둘러 보다가 ,

술잔을 보다가
갑자기 아버지가 떠올랐다.


3. 세종대왕릉 술잔, 작(爵)

작 爵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 제사 때 쓰던 술잔. 모양은 참새와 비슷하고 손잡이와 세 개의 긴 발이 달렸다.


15년전쯤 2008년경
아버지 생전의 일이다.

어느날 전화를 하셔서
서울 어디 고미술이나 골동품 파는데 가서 전통 제기를 구입해서 시골에 가져오시라고 하셨다.

무슨 제기요?

옛날 양반들이나 왕들이 쓰던 세발달린 황동 술잔을 서너개 사오라고 하셨다.

그래서

종로 낙원상가를 중심으로
조계사 뒤쪽 길은 물론 황학동거리를 몇번 다녔는데 못찾았는데,

어느 집에선가
주물 제작으로 만들 수가 있다고 한다.

단가가 어떻게 되냐고 물었더니,

그때 당시 술잔 하나당 13만원인가를 주라고 하길래 못샀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망설임없이 술잔을 주문해서 가져다 드렸다면,
설이나 추석 그리고 제사때 아버지 마음이 얼마다 좋으셨을까 하는 후회스러움과 아쉬움에 나도 몰래 눈시울이 불거졌다.

내려오는데
무슨 호수도 있고,
논들도 보였다.

왕릉인데도 제사때 사용하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문중묘 밑에 있는 문중논밭과 똑같은 개념이었다.

4. 신륵사 구경과 유명 빵집

영릉을 구경한후
여주역까지 트레킹을 하기로 했는데,
차를 두명이 가지고 와서,
맛집에 가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여주 맛집을 조회하니,
신륵사옆에 맛집이 있어 그곳으로 향했다.


설렁탕을 먹고나니,
회비를 2만원씩 각출했는데 비용이 남았다.

그래서
일부는 식당에서 걸어서 갈 수 있는 신륵사구경을 하고,
그 시간에 근방에 있는 여주 유명 맛집에서 빵을 사기로 했다.

여주의 대명사는 단연 신륵사다.

봉미산(鳳尾山) 남쪽 기슭에 신륵사가 자리잡고 있다.

뒤로는 숲이 우거지고 왼쪽 곁으로는 안벽(岸壁)이, 마당 앞으론 여강(驪江)이라 부르는 남한강이 유유히 흐르는 절경이다.

강가에 있는 거의 유일한 절이어선지,
미국 CNN이 뽑은 꼭 가봐야 할 한국의 여행지 50에 선정된 곳이다.

신륵사는 아름다운 경관과 많은 유물·유적들을 간직하고 있다.

동기들이 신륵사를 구경하는 동안,

빵명장 여주점이 근방에 있어 ,
빵집에 들러 빵을 사와
일부는 나눠 먹고,
일부는 몇개씩 포장을 해가지고 갔다.

5. 마무리

여행의 끝은 거의 비슷한 것 같다.

차를 타고 가는 동기들은 집에 들어가고,

몇명이 경강선을 타고 오다가,  한잔 더 ? 하고 눈빛으로 끄덕이고 분당에 모여
당구도 한게임하고,
또 유명 중국집에 들려 2차를 하고 집에 오니 저녁 11가 넘었다.



그런데로 멋진 여행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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